서른 즈음에

20대 마지막 일기

by 소니


주말 늦은 오전까지 기분 좋은 늦잠을 자다가 맞은 편 건물에 반사된 햇빛에 눈부셔 하며 일어났다. 학생 때와 달리 마음껏 잠을 자도 그 어떤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푹신한 이불의 촉감과 상반된 차가운 겨울 냄새에 베시시 웃으며 일어났다. 어른의 행복이란.


핸드폰에는 연락이 쌓여있었는데, 용건없이 연락하시지 않는 엄마의 카톡이 보여 가장 먼저 읽었다. 행복해야 할 연말에 발생한 항공기 사고 소식을 전하셨다.


들떠있던 기분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떠나간 사람들도, 떠나간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도 걱정이 되어 머리가 복잡했다. 그리고 저녁 7시까지 계속 이불 속에서 잠을 잤다. 기나긴 잠을 자는 것은 스트레스를 피하는 방법이다. 자고 있어나면 모든 것들이 꿈일 것만 같아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도, 우리 엄마도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에는 참으로 취약하다. 아니, 사실 나는 엄마에 비할 바가 못된다. 엄마는 세월호 사고 후 깊은 무기력감과 우울에 빠지신 뒤에 아직도 서서히 회복하는 중이다.


가끔 맥락없이 세월호 사고 얘기를 꺼내며 눈물을 글썽거리시니, '트라우마는 본인이 만드는거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언제까지 그러실 것이냐며 짜증을 냈지만, 오늘 다시 한 번 세월호 생각을 하며 우울해 할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유가족을 생각하다가 멀쩡히 잘 지낼 엄마 걱정이 앞서니, 나도 참 이기적이다.






올해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 가장 의미 부여를 하고 싶은 사건은 성근이를 만난 것이겠지.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리고 의도하지도 않았을 것 같지만, 성근이는 사람과 사랑에서 받은 상처를 짧은 시간 내에 치유해주었다.


밝고 긍정적이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아서 좋았다가 신뢰를 느끼고 기댈 수 있게 되었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는 불안하지 않고 단단하다. 긴 세월 같이 추억을 쌓고, 그 추억을 함께 돌이키며 행복해 할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신기한 일이지.


사랑과 결혼에 관해 혼자 많은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피상적으로 끝나기 마련이지만, 이제 사랑은 알 것 같은 것을 보니 정말 사랑을 하고 있나 보다.


성근이는 집중하지 않고 핸드폰을 만질때는 새끼 손가락 하나를 들고 액정 화면을 톡톡 건드린다. 그리고 하루에 일정 시간은 쇼츠나 릴스를 봐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 마냥 베개에 턱을 괴고 액정 화면을 응시하다가, 넘기다가, 웃다가 어느새 잠이 들어있다.


연애 초에는 같이 있는 시간에 유튜브를 보는게 못마땅해서 좀 방해를 했던 것 같은데, 요새는 베개에 눌린 볼살이 귀여워서 볼을 만지작거리다가 옆에서 웹툰을 보곤 한다.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으러 다녔더니 둘다 뱃살이 볼록 나왔다. 뱃살조차 귀엽긴하지만... 그조차 귀여워하다가는 옷들이 금새 작아지고 몸이 무거워질 것 같아 신년에는 살을 좀 빼기로 했다.


가끔 본가에 가면 부모님은 성근이랑 잘 지내고 있느냐고 떠보듯이 물어보셨다. 그러다- 연말에 대구에 내려가서 성근이 부모님을 뵐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니 아버지가 깜짝 놀라셔서, 빠른 시일 내에 남자친구를 보고 싶다고 성화였다.


연애나 결혼이나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던 아빠였는데 막상 현실이 될 것 같으니 당황하신 것 같아 재밌는 마음이 반, 걱정되는 마음이 반이었다.


아버지는 남자친구라는 존재를 단 한번도 인정한 적이 없었다. 관행적인 의미를 이해하시면서도, 애써 부정하며 그저 남자인 친구가 아니냐며 되물으시고는 했다. 사실 어렴풋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남자친구라고 해도 부모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 이상의 관계까지 갈 수는 없다.’는 선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어떤 선물도 외면하셨고 집에 와서 남자친구 얘기를 하면 귀를 닫고 잘 듣지 않으셨다.


엄마는 그런 아빠의 고집을 맞춰 준 것인지 엄마만의 고집이 또 있었는지 그저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 싶으셨던 것인지 몰라도 ‘결혼할 사람이 아니면 보고싶지 않다.’고 선을 그으셨다. 그런 아빠가 먼저 남자친구를 보자고 하셨고, 엄마 역시 아빠에게 고리타분하다며 핀잔을 주면서도 내심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눈치였다.


부모님이 남자친구를 인정하면 좋을 줄만 알았는데 책임감이 몰려왔다. 아직 예식장이나 집을 계약한 것도 아니지만 그보다 더한 확신이 필요했다. 계약이야 위약금을 물고 취소하면 되지만 부모님의 기대감이나 실망감은 내가 손쓸 수 없는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부담스럽다고 거절하기에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같아 일사천리로 아버지 회사 앞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나 3자대면을 했고, 버거웠던 마음과 달리 30분 정도의 산뜻한 담소로 마무리 지어졌다.


아빠가 남자친구를 어떻게 보았을지, 남자친구는 아빠를 어떻게 보았을지, 그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았는지 여러모로 궁금했지만 둘다 솔직한 마음보다는 장점만 말할 것 같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쨌든 아빠는 내 가족이지고 성근이 역시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양쪽에서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마음도 컸다.







ETC.


*귀멸의 칼날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정주행 중이다. 문제는 밤마다 오니(도깨비)가 나오는 꿈을 꿔서 괴롭다. 나는 항상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다.


*미식과 와인에 관심이 많았기에 흑백요리사와 레미제라블, 냉부해 등 요리를 주제로한 콘텐츠도 흥미롭게 시청하면서도 어쩐지 같은 틀 안에서 스토리가 반복되어 시시해지고 있는 중이다.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나 아이돌을 보면서 이제는 세대가 교체되었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젊음과 청춘을 내세울 나이는 지나갔음에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지킬 것이 많아져 보수적으로 바뀌는 스스로의 모습이 영 싫지는 않다.


*회사에서 무리한 요구를 당당하게 하면 멜랑꼴리한 잡생각이 사라지고 회사에 대한 분노가 뇌를 지배한다. 아버지께서 회사에서 받는 작은 스트레스들이 있어야 더 건강하게 살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한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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