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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01. 2021

누구나 멈춰서야 하는 때가 있다

손카피의 콘텐츠 속 평생교육 3화



아무리 바빠도 꼭 챙겨 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유 퀴즈 온 더 블럭>이다. 주변에 꼭 한 명은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어디서도 듣지 못할 유명인들의 이야기까지.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다 보면 기록해두고 싶은 문장들이 한가득하다. 마치 KBS <인간극장>의 인터뷰 판 같다고나 할까. 연령대에 관계없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출처: TVN


지난 7월에는 평소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했다. 최고의 타짜를 꿈꾸는 고니, 자폐증을 가진 마라토너 초원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황시목 검사까지 어떤 배역을 맡아도 그 인물 자체가 되어버리는 배우 조승우였다. 자그마치 16년 만의 예능 출연이라 중반부까지는 캐스팅 비화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렇게 유쾌하게 흘러가던 대화는 유재석 씨의 ‘요즘 조승우 씨의 고민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까 고민 중이에요.”


의외의 대답에 두 귀가 쫑긋해졌다.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탄탄대로만 걸어온 그는, 젊은 시절에 자유분방함을 누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자 ‘조승우라는 사람은 뭘까?’라는 질문이 생겼는데, 특히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부터 ‘헤드윅’, ‘베르테르의 슬픔’, ‘맨 오브 라만차’까지 쉼 없이 달렸던 시기엔 자신을 잃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감정을 너무 많이 쏟아낸 탓이었다.


“상대 배우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앞에서 연기를 하는데, 그 순간 ‘오늘 밥차 뭐 나오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그 순간 소름이 쫙 끼치면서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고 느꼈죠.”


그렇게 두 달간의 휴식기를 가진 조승우 씨는 기적처럼 '비밀의 숲'이라는 작품을 만났다. 그에게 찾아온 배역은 감정의 대부분을 잃은 인물, ‘황시목’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때 그 시기, 조승우라는 배우에게 가장 제격인 역할이었다.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그렇게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했다.


출처: TVN ‘비밀의 숲’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지난날을 털어놓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잊고 있던 어느 한때가 떠올랐다.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 지 어느덧 6년. 말로만 듣던 ‘번아웃’이 찾아왔다. 모든 걸 다 쏟아부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그야말로 무기력한 상태였다. 생전 처음 마주하는 현실이라 당황하고 있던 그때, 나의 사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딱 한 마디만을 건넸다.


“쉴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쉬고 와. 지금의 너에게 꼭 필요한 시간일지도 몰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쉬는 시간’이란 것을 나태하거나 도망치는 시간이라고 여겨왔다. 가만히 있는 시간은 가치 없는 시간이라고, 그래서 어렵게 얻은 휴가조차도 빽빽하게 무언가를 채워야만 마음이 놓였다. 첫날엔 두려움이 앞섰다. 뭘 해야 하지.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나에겐 과제였다.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집 앞 산책길을 걷고,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버스를 타고 곧장 가게로 향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고, 혼자 있고 싶을 땐 휴대폰은 저 멀리 둔 채,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오롯이 나의 에너지를 채우는 데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고 나니,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열심히 달려보고 싶었다.


출처: Unsplash (@irisjuana)


이제는 안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있어야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잘 성장할 수도 없다는 걸. 지금껏 열심히 달려왔다면 잠시 멈춰 서서 지금껏 달려온 길을 한 번쯤 돌아봐도 괜찮다. 앞을 향하던 시선을 옆으로도 돌려보고,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자신을 향한 질문들을 던져봐도 좋다. 우리는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게 아닐 테니까.


그 시간들을 잘 보내고 나면, 분명 조승우 씨에게 찾아온 <비밀의 숲>처럼 우리에게도 기적과 같은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건 지치지 않은 상태의 우리다.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의 매거진 <라이프롱런>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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