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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25. 2015

일 년에 딱 하루

나는 항상 두 사람보다 느리고 부족하다


여덟, 아홉 살 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담임 선생님이 다음 시간까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알아 오라 하셨다. 너무 어린 나이라 결혼기념일의 중요성을 잘 몰랐을 우린,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아마 '여러분을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게 한 아주 특별한 날이니 꼭 알아둬야 해요' 정도로 이유를 꼽으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때를 계기로 처음, 우리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 그럼 쟨 결혼하자마자 태어난 거예요?"


내가 발표할 차례가 되자 반에서 가장 지독한 장난꾸러기였던 남자아이가 큰소리로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질문이다.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질문- 그렇다. 우리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은 내 생일과 같다. 엄마, 아빠가 가족이 된 날이자 내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언니의 가족이 된 날이기도 했다. 몇몇 아이들은 쟤 진짜 바보다, 수군거렸고 또 몇몇 아이들은 우와 신기하다, 속삭였다. 내게 있어 11월 22일은 매년 축하 받음과 동시에 축하하는, 정말 신기한 날이 되었다.


"참 신기하다, 얘. 매년 네 생일 때마다 이렇게 따듯하잖니. 겨울인데도 겨울 같지가 않아. 네가 우리 곁에 온 걸 세상도 다 아는가 보다."


엄마는 11월 22일 아침이 밝으면 항상 이 말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네가 태어난 날이라 그런가 봐,라는 닭살스러운 말도 그날은 왠지 듣기 좋았다. 일 년에 딱 한 번인 이날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게, 축하받고 사랑받는 게 당연하다 여겨졌다. 29번째 생일에도 엄마는 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올해 아침은 왠지 모르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생일에 대한 감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특별한 걸 해야만 할 것 같고, 나 생일 잘 보냈어, 세상 곳곳에 알려야 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분명 그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점심 때쯤 집을 나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해가 질 무렵엔 팝콘과 맥주를 사들고 좋아하는 배우의 영화도 봤다. 늘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들,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사람들로 하루가 북적였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래서 한편으론 평온한 하루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유난히 엄마,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매년 '결혼기념일을 축하합니다!' 문구를 적은 카드와 커다란 꽃다발, 선물을 준비하긴 했지만 온 가족이 모여 이 날을 축하할 때면 자연스레 생일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지곤 했다. 그 조그맣던 애기가 언제 이렇게 컸나, 너 어렸을 땐 이랬었어, 라며 나의 어린 시절을 곱씹어보는 게 필수 일과였다. 그래서 11월 22일은 나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는 게 익숙하디 익숙한 날이었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35년 전, 26살의 엄마와 28살의 아빠는 이날을 어떻게 보냈을까, 머릿속에 더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졌다.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엄마와 아빠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했을 것이고, 성당에 도착한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고맙다, 고맙다, 이야기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 모든 사람들의 박수가 오로지 두 사람을 향해 있었을 것이며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그려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부모님을 끌어안으며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을 것이다. 이토록 구체적으로 그날이 그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3달 전,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하는 모든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결혼기념일'이 가진 의미를 전보다 더욱 깊게 생각하게 되어서일까. 올해 11월 22일이 유독 다르게 느껴진 이유가 있었다. 내게 특별한 날인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엄마와 아빠에게도 무척 특별할 날이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결혼기념일 축하해' 대신 '결혼해줘서 정말 고마워. 엄마 아빠가  하나된 걸 축하해!'라고 말했다. 마음에 담긴 말을 하나하나 모두 전하고 싶었지만 그저 몇 개의 단어들이 입가를 맴돌 뿐, 잘 표현이 되지 않았다. 아, 아무리 빨리 철이 들려고 해도, 그때그때 이 마음을 다 전하려 해도- 나는 늘 느리고 부족했다. 언제나 먼저, 더 많이 나를 생각하는 두 사람이라서 이때도 또 한 번 가슴 먹먹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고 됐다. 됐다. 결혼기념일, 그게 뭐라고. 생일 축하해, 우리 딸! 엄마 아빠 곁에 와줘서 고마워. 오늘은 네가 세상에서 제일로 행복해야 한다."


올해도 엄마와 아빠의 결혼기념일은 참으로 따듯했다. 하루 종일 따스한 햇살이 세상 곳곳에 가득했다. 마치 오늘의 두 주인공이  하나된 걸 세상도 다 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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