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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27. 2015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

우리, 지금보다 더 가깝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건 누가 해볼까?"


중학교부터 고등학교를 거치기까지 이 질문만 나오면 모두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날짜를 확인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교과서 페이지를 확인했다. 출석번호가 18번이었던 나는 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 친구들은 킥킥 웃으며 내 등을 콕 찔렀다. 유독 출석번호에 집착하던 영어 선생님은 어김없이 '18번'을 외쳤다. 지목이란 게 그랬다. 타인에 의해 선택되어지고, 어쩔 수 없이 주변으로부터 시선을 받게 되면 잘할 수 있는 일임에도 왠지 모르게 피하고 싶었다. 확신에 찼던 답도 한 번 더 확인하게 됐다.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나는 그런 상황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무난하게 흘러갔으면 했다. 내가 원하지 않을 때 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그런 날들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에 있어선 누구보다 열심히였지만 억지로 시켜서 하는 일, 누군가로 인해 해야만 하는 일엔 뭉그적뭉그적 느림보가 되어버렸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나서서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불필요한 일엔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고 번거롭게 느껴졌다.  


'내가 뭐, 굳이'


언제부턴가 나는 이 생각을 참 쉽게 하고 있었다. 누군가 하겠지, 나까지 나설 필요 없다, 그날도 어떠한 광경 앞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스스로를 알아차렸다. 이토록 무던해져 버린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지나온 시간들을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 봤다. 예전엔 분명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제가 해볼까요, 별다른 생각 없이 행동이 먼저 앞섰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생각에 한창 사로잡혀있을 무렵이었다. 그날 저녁도 144 버스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공간 안에 무척이나 가깝게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100m 아니, 그 이상의 거리만큼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무관심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어쩌면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을 수도 있는데, 엉뚱한 생각을 하다 그만, 양손에 있던 짐을 놓치고 말았다. 봉투 안에 담겨있던 온갖 물건들이 데구루루 쏟아져나왔다. 그때, 바로 앞에 앉아있던 30대 중반 정도의 여자분이 벌떡 일어나 앞자리까지 굴러간 물건들을 주워주었다. 처음엔 아는 사람인가 싶어 쳐다봤는데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모든 물건들이 금세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했다.


잠시 후, 정류장에 다다르자 그녀의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바퀴가 있는 부분이라 올라앉기 불편한 자리였다. 잠시 멈칫하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아가씨, 여기 바깥쪽에 앉아. 짐은 이쪽에 올려두고. 내가 안으로 들어갈 테니까."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이미 안쪽 자리로 옮겨가 있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치마 입었을 땐 이런 자리에 앉기 좀 그렇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아는 사이인가, 착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끄러미 우리를 주시하던 사람들은 참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건이 쏟아져 나왔을 때도 빈자리에 앉지 못했을 때도 그녀가 '굳이' 나서서 도와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내게 그런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했다. 온종일 촬영 물품을 사러 돌아다니느라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조금씩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뭐, 굳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인가.


강남역에 다다르자 그녀는 잘 가요, 짧은 인사를 건네며 버스에서 내렸다. 창을 통해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녀의 하루는 왠지 흐뭇한 일들로 가득할 것 같았다.


그 주 주말, 미루고 미루던 전시를 보기 위해 번화가를 찾았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느릿느릿 걷고 있을 때, 택시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채 한 자리에 머물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빈 차 표시등은 꺼져있었고, 운전석 문은 반쯤 열려있는 상태였다. 기사님은 인도로 올라와 허둥지둥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인도에 있는 사람들은 힐끔 한 번 쳐다보곤 그대로 지나갔다. 순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함께 있던 그의 팔을 끌고 기사님이 있는 쪽으로 후다닥 걸어갔다.


"관광객들이 중국 대사관에 가 달라고 했거든. 분명 이 근처가 맞는 것 같은데 네비에선 잡히질 않고,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보이질 않아서 한참 헤매는 중이에요. 혹시 어딘지 알려줄 수 있어요?"


중국과 조금의 연도 없는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하며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위치를 파악한 후, 택시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가 천천히 주소를 불러드렸다. 길치인 내가 저쪽에서 저쪽으로 꺾으시면 된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아저씨는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맙다고 말했다. 뒷좌석에 있던 중국인들도 찡긋, 눈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고, 착한 일 했네."


그땐 응,이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건 누군가를 위한 착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우리에게 좋은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 작고 사소한 일이 그날, 거리를 거니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만난 그녀처럼 '내가 뭐, 굳이'라는 생각을 잠시 접어두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잠시 잊어버리면- 미소 지어지는 일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만나볼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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