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의 조직인 학회라는 느슨한 조직은 표면적으로는 이권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유무형의 자원을 주고받는 공간이다. 그 자원은 학술대회에서 나눌 수 있는 학문적 성과뿐만 아니라 만남을 통해 형성되는 인맥도 포함한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박사 학위를 받고석사 때 지도교수님을 찾아뵌 자리에서 그분은 "이제부터 할 일은 평판을 잘 쌓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온 제자에게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씀이신가... 했었는데, 귀국하고 약 1년 반 동안 학계를 경험해 보니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한 전문 분야의 학자들이 모이는 학회는 마치 손바닥처럼 좁아서, 누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은 한 다리만 거치면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학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학자들은 더욱 적은 수이기에 그 권력의 핵심은, 마치 빅브라더처럼 "이번에 누가 어느 기관의 어느 자리에 지원을 했더라" 수준의 구체적인 정보까지 순식간에 모이게 된다.
이러한 학회는 보통 다수의 연구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국토개발을 연구하는 연구회, 지방 이슈를 연구하는 연구회,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연구회, 여성문제를 연구하는 연구회, 신진학자들이 모여있는 연구회, 노인문제를 연구하는 연구회, 이민문제를 연구하는 연구회 등이다. 즉, 유사한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여 하나의 연구회를 구성하고 그런 연구회들은 하나의 큰 학회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사한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냥 모인다고 해서 학회의 연구회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정식 연구회로 승인받기 전 단계인) 특별위원회'라는 명칭으로 1년 동안 수 차례의 세미나를 열고, 회의를 하고, 회원 수를 늘리고, 임원진을 구성하는 등 실적을 쌓아야 하고 그 이외에도 학회 정관에 의해 규정된 구체적인 조건을 충족해야 총회를 통해 정식 연구회로 승인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쫓겨난 곳, '조직에 기여할 바가 큰' 가해자에게 '일 할 공간을 내어주라'는 말을 들으며, '개인의 일로 조직의 갈등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쫓겨난 곳은 정식 연구회로 승인받기 위해 준비 중인 특별위원회였다. 학회의 정식 연구회로 승인받고자 1년 동안 실적을 쌓으며 활동하던 특별위원회. 나는 그곳에 포함되어 있다가 쫓겨난 것이었다.
그리고 어제가 총회날이었다. 학회의 운영위원회가 열리고, 총회가 열리고, 그리고 특별위원회들의 그 간의 실적을 검증하여 정식 연구회로 승인하는 날.
지난 6월부터 나는 특별위원회의 회장님과 나에게 '거취를 결정하라'라고 한 운영진 1인에게 수차례 2차 가해에 대한 항의를 했지만, 그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묵살당해 왔기에,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민주적 절차는 총회 자리에서의 '이의제기'라고 생각했다. 이 특별위원회의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가해자 중심적인 운영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정식 연구회로서의 자격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절차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가장 무섭고 두려운 절차, 제발 여기까지는 가지 않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던 절차였다.
그렇지만,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셨던 교수님들도 결국 나를 도와주지 못하시거나 않으셨고 내게 포기하라는 조언만 해 주셨다. 참고 넘기라고. 그렇지 않고 총회에서 이의제기를 한다면 결국 너만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성 관련' 문제에 엮인 애라는 꼬리표만 달게 될 것이고, 취업도 못하게 될 것이고, 학회에서도 결국 외면당하는 것은 너일 것이라고. 나 역시 다 알고 있었지만, 그분들은 나를 아끼시는 마음으로 이러한 현실을 반복하여 알려주셨다.
나는 주관이 과하게 뚜렷하여 타인의 의견을 잘 듣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도 겁이 났기에, 끝까지 문제제기를 할 경우 내게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리면 서늘함을 느낄 정도로 무서웠기에 마음을 계속 바꾸고 또 바꾸며 그 종착역은 '포기'였다. 여기 브런치에도 "졌다, 나는 결국 패배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2차 가해에 대해 끝까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을99% 포기했었다.
약 2주 전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을 하면서도 "저 포기하기로 했어요"라는 말을 했었다.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시는 분들이 많은 시간을 내어 나를 설득하신 것을 생각하며... 그분들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그 애잔한 눈빛을 핑계 삼아, 내가 다 포기하기로 했다고. 그냥 다 포기하고 조용히 실적 쌓아서 취업만 생각하며 살겠다고, 2022년은 너무 고단했다고... 의사 선생님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학회에 이의제기를 한다고 해서 학회 운영진이 특별위원회의 운영에 개입할 수 있다는 회칙이나 정관과 같은 근거도 없기에, 학회는 본래 느슨한 조직이기에, 그저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또 초라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 마지막 일주일을 남기고 나는 또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나 자신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와는 무관하게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 해야, 무섭지만, 몸이 떨릴 정도로 두렵지만, 피부로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의 공포를 느끼지만,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남은 인생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임기가 일주일 남은 2022년의 학회장님에게 'OOOO특별위원회의 정식 연구회 승인에 대한 이의제기'라는 글을 A4 한 페이지 반으로 작성하여 이메일로 발송했다. 내가 마지막에 또다시 마음을 바꿀까 봐 새벽 6시로 예약 발송을 맞춰놓고 나는 침대로 갔다. 그렇지만 그날 밤 난 단 한 숨도 자지 못했다. 그다음 날 출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뜬 눈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예약 발송된 이메일은 회장님과 임원진 1인에게 결국 도달했다.
그리고 어제가 총회였다.
오늘 연락을 받았다. 2022년 임원진의 임기 마지막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OOOO특별위원회'가 정식 연구회 승인받지 못했다고. 승인이 보류되었다고. 학회 역사상 모든 조건을 다 충족한 특별위원회가 승인받지 못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이의제기의 목적이 그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했던 소식을 전해 듣고 몇 초간 멍 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은...
"아....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 그런데 특별위원회의 그분들은 정말 절... 잡아 죽이고 싶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