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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짧지식 Jun 10. 2020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었다

광해군을 향한 엇갈린 평판

동영상으로도 보러오세요 ^0^

https://youtu.be/FX5izegBlAE


1.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었다

'군'으로 끝나는 조선시대 왕은 두 명뿐이다. 연산군과 광해군. 연산군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냥과 사치를 즐겼다.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고, 조선시대 언론이었던 사간원을 폐지하기도 했다. 나라 상태는 엉망이 되었고, 백성들은 더 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광해군은 어떨까? 광해군도 연산군처럼, 무자비하고 무능력한 폭군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광해군과 연산군은 확연히 다르다. 광해군은 오히려 폭군이 아닌, 선군에 가까운 임금이었을지도 모른다.


- 한 줄 요약 : 광해군은 연산군과 달리 무자비하고 무능력한 폭군이 아니다.


사진 출처 : 광해, 왕이 된 남자


2. 광해군의 일생

광해군은 조선 14대 왕 선조의 아들이다. 광해(光海)의 뜻은 빛나는 바다이다. 원래 광해군은 왕이 될 수 없는 자격을 가졌다. 공빈김씨라는 '첩'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영민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남에 따라 세자가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선조는 서울에서 의주로 피신했다. 의주는 한반도의 최북단, 명나라 바로 옆 도시였다. 백성들은 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간 사실을 알고, 화가 나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조는 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민심을 수습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자신은 안전한 곳에 피신해있고, 광해군을 대신 총알받이로 내보낸 것이다. 이후 광해군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그는 임진왜란의 영웅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민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며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의 인기는 떨어지고 광해군의 인기는 올라갔다. 선조는 이런 광해군을 시기 질투하기 시작했다. 이후 선조는 인목대비라는 새로운 왕비를 맞게 된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선조는 세자 자리를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으로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선조가 죽었고, 결국 광해군은 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며느리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당했다. 아들은 땅을 파서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이후 며느리는 스스로 목 메달아 자살하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아내도 화병으로 죽게 된다. 결국 광해군은 홀로 남게 된다. 군관들도 광해군을 무시했고, 결국 그는 이렇게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광해군의 마지막은 비참하고 쓸쓸했다.


- 한 줄 요약 : 광해군은 영민함, 임진왜란, 선조의 죽음으로 인해 왕이 될 수 있었다.



3. 광해군의 경제적 업적 (대동법)

광해군의 업적은 여러 가지가 있다. 호패제 (주민등록증)를 추진했고, 허준을 시켜 동의보감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소실된 창덕궁과 경희궁을 재건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경제적 업적은 바로 '대동법'이다. 대동법이란 공물 (특산물)을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한 납세제도이다. 쉽게 말해, 광해군은 대동법을 도입해 불합리한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대동법이 시행되기 이전, 조선시대의 세금 제도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전세 (토지세)다. 땅을 가진 지주가 내야 하는 세금이었다. 세금은 곡물 수확량의 10분의 1로 납세했다. 두 번째는 역 (인두세)이다. 16~60세 성인 남성이 내야 하는 세금이었다. 보통 군역 (군 복무)로 세금을 대체했다. 마지막으로 공납 (호세)라는 세금 제도가 있었는데, 이게 그 당시 문제가 되는 제도였다.


조선시대 세 가지 세금 제도중 공납이라는 세금 제도가 문제가 되었다.


공납은 집을 가진 사람이 내야 하는 세금이었다. 이 세금은 그 지역의 특산물로 내야 했다. 예를 들어, 밀양의 특산물이 사과라면, 밀양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사과로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 특산물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밀양의 특산물이 사과였다가, 참외로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왕실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계속 사과로 바치라고 강요하게 된다. 지방의 사또들이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 봐, 특산물이 바뀌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대납가가 등장하게 된다. 대납가란 대신 납부해주는 사람을 뜻한다. 즉, 이들은 다른 지방에서 사과를 사 와서, 그 지역의 백성들을 대신해 사과를 납부해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상인이었다. 세금을 내기 위해 이들에게 사과를 구매한다면, 두 배가 넘는 가격을 지불해야만 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져갔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조정은, 바뀐 특산물인 참외로 세금을 납부하라며 민심을 수습했다.


대납가에게 더 비싼 값으로 특산물을 구매해 세금을 바쳐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지방의 사또들이 참외를 그냥 받지 않았다. 참외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트집 잡으며, 방납자를 통해 구입한 참외만 받는다고 했다. 따라서 백성들은 자신들이 농사지은 참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납자의 참외를 사서 바쳐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방납자가 파는 참외는 대략 100배나 더 비쌌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못 견디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인징 (이웃이 도망가면 그 몫까지 내가 세금을 내야 함)과 족징 (친척이 도망가면 그 몫까지 내가 세금을 내야 함)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삶은 더 피폐해져만 갔다.


사람들은 방납자에게 더 비싼 값으로 특산물을 구매해 세금을 바쳐야만 했다.


그때 광해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동법'을 도입하게 된다. 대동법은 토지를 가진 사람에게 쌀로 세금을 부과한 세금 제도이다. 집을 가진 사람이 특산물로 납세하던 공납이라는 세금 제도를 없애고, 이 대동법을 도입한 것이다. 따라서 재산이 많고 부유한 부자들은 세금을 더 내야만 했고, 가난한 백성들은 세금을 덜 내도 된 것이다. 현재로 따지면, 종합소득세와 같은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 한 줄 요약 : 광해군은 대동법을 도입함으로써 공납을 폐지하게 된다.



4. 광해군의 외교적 업적 (중립외교)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왕이었다. 그는 명과 후금(청)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펼치며, 조선의 이득을 챙겼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정명가도 (명나라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길을 빌려 달라)를 외치며 조선을 공격했다. 이때 명나라는 조선에 대군을 파병하게 되고, 결국 임진왜란은 명과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전쟁 이후, 조선은 나라가 완전히 박살 났고, 명나라는 무리한 파병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들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명의 상황은 매우 힘들어졌다.


그 당시, 여진족은 후금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후금은 명나라를 공격하게 된다. 이때 명나라가 조선에 도움을 요청했다. 의리와 명분을 본다면,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주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다르게 행동했다. 현재 조선의 상태는 누구를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막강한 힘을 가진 후금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조선이 망하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게 된다. 명분보다는 나라를 위해 실리를 따졌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2만 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하지만 동시에 후금에 서신을 보냈다. 서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명나라가 두려워 2만의 군사를 파병했으나, 후금과의 싸움을 원치 않으니, 부디 우리 군사들을 무사히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광해군은 명에 파병을 보냄과 동시에, 후금에게 서신을 보내며 중립외교를 했다.


- 한 줄 요약 : 광해군은 의리와 명분이 아닌, 국가를 위한 실리를 따지며 중립외교를 했다.


사진 출처 : EBS


5. 광해군이 폭군이 된 이유

대동법은 돈이 많고 부유한 양반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또한 당시 사대주의 사상에 빠져있던 성리학자들은, 아버지 나라인 명을 배신하고 후금이라는 오랑캐와 손을 잡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광해군은 대동법과 중립외교만으로 이미 신하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광해군은 대동법과 중립외교로 인해 신하들에게 미움을 사게 된다.


광해군 이전부터 조선은 붕당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붕당정치는 학맥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형성된 서로 다른 집단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현재도 많은 국가들이 붕당정치를 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당과 미래통합당,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처럼 말이다. 붕당정치는 문제가 아니지만, 이게 심화되면 문제가 된다.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 집권 시절, 북인과 서인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북인은 비교적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이었고, 서인은 비교적 명분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정당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자신과 함께한 북인을 신뢰했다. 특히 그중 이이첨이라는 신하를 신뢰했다. 이이첨은 광해군에게 왕위에 위협이 될만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따라서 이를 명분으로 서인과 남인 (또 다른 정당)이 힘을 합쳐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이로 인해, 인조가 왕이 되고 광해군이 쫓겨나게 된다. 북인은 괴멸되었다. 이후 서인이 주축이 되며,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게 된다.


어머니를 쫓아내고 형제를 죽인 혐의로 광해군은 폐위된다.


- 한 줄 요약 : 서인들에게 미움을 산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 혐의로 폭군이 되어버린다.


사진 출처 : JTBC


6. 광해군 이후 조선

광해군 이후 인조가 왕이 된다. 명나라가 거의 망해가는 상황에서, 청나라(후금)는 조선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인조와 서인들은 이를 거절하고 청나라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이로 인해, 청나라가 조선에 쳐들어오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이 당시, 조선은 누구와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은 일방적으로 청나라에 의해 학살당하게 된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숨어있다가, 결국 항복하고 청나라에게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 앞에서 큰절을 한다. 이때 이마를 땅에 박으면서 큰절을 하다 보니,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흐르게 된다. 이 사건이 삼전도 굴욕이다. 이후 인조의 아들과 조선 여자들은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많은 능욕을 당한다.


- 한 줄 요약 : 광해군 이후 조선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 참고자료

(1) 왕의 꿈, 왕의 조건, 조선 15대 왕 광해 - KBS 역사스폐셜

(2) 설민석 선생님의 광해 - 설민석


* 유튜브 : https://bit.ly/2XOPktn

* 팟캐스트 : https://bit.ly/2LOVuTE

* 밴드 : https://band.us/@knowledge

* 이메일 : marksknowledg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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