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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짧지식 Jan 08. 2021

쉽게 알아보는 노자 도덕경

노자를 통해 알아가는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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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r9i-ILvT8I


1. 쉽게 알아보는 노자 도덕경

기원전 5~6세기 무렵, 세계 여러 고대 문명국가에서 뛰어난 학자와 사상가들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의 철학가 헤라클레이토스와 소크라테스, 인도의 석가모니, 중국의 노자와 공자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했는데, 이들의 공통 관심사는 우주에 대한 의문과 인간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해답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보편적인 가르침은 '사람은 똑똑하고 강해야 한다'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을 깨뜨린 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노자였다. 노자는 "사람은 부드럽고 어리석어야 한다. 강한 것은 부러지기 쉽고 부드러운 것은 온전하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게 보인다."와 같은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노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봤을까? 노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노자의 말속에서 어떤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까?


- 한 줄 요약 : 노자의 가르침을 통해 삶의 지혜를 알아보자.



2. 노자는 어떤 사람일까?

우선 노자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먼저 알아보자. 노자는 주나라 왕실 도서관의 사서에 해당하는 말단 관리였다. 노자는 사서로 일하며 수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노자는 세상의 모든 다툼은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되고, 모든 죄악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주나라가 쇠퇴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주소왕 23년에 국경인 함곡관을 지나다가 국경 경비대장인 윤희를 만나게 된다. 그때 윤희가 노자에게 자신을 위해 글을 써주길 부탁한다. 윤희의 부탁을 받은 노자는 '예'의 허구를 날카롭게 풍자하며, '참다운 도와 삶'에 대한 글을 5000자 남기고 그곳을 떠나게 된다. 이후 그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일생을 마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서관 사서였던 노자는 우연히 윤희를 만나 그의 가르침에 대한 글을 남긴다.


그렇다면 노자는 왜 '예'를 비판했을까? 당시에는 신분에 따라 예법이 각각 달랐다고 하는데, 이 말은 신분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달랐다는 것이다. 집의 규모가 다른 것은 물론 듣는 음악도 달랐고, 길을 갈 때도 남자는 오른편 여자는 왼편으로 가야하는 등 여러 가지 규율이 존재했다. 심지어 제사를 지내는 법, 노동과 세금을 부담하는 규범까지 전부 정해놓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가를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 그 당시 예법이었던 셈이다.


노자는 이런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둔 '예'를 비판한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56장과 57장에서 "진실한 도와 덕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서 얻을 수 없고, 인의와 예를 가지고 다스려도 혼란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노자는 물질 세계의 풍요와 문명 세계의 화려함 속에서도 고통과 비극이 존재하고 있음을 꿰뚫어 본 셈이다.


노자는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둔 예법으로는 도와 덕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 한 줄 요약 : 노자는 예의 허구를 풍자하며 참다운 도와 삶에 대한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3. 도덕경은 어떤 책일까?

그렇다면 노자의 가르침이 담겨있는 <도덕경>은 과연 어떤 책일까? 도덕경의 상편은 도경이라 불리고 하편은 덕경이라 불리는데, 이게 합쳐져 <도덕경>이라고 불린다. 말 그대로 도경은 '도'에 대해 다루고, 덕경은 '덕'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도경이라고 해서 도만, 덕경이라고 해서 덕만 다루는 것은 또 아닌데, 그 이유는 도와 덕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일뿐더러 원래 구분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윤리나 규범일까?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덕이란 그렇게 단순한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니다. <도덕경>에서 도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뜻하고, 덕은 그런 도가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용을 의미한다.


도덕경은 도덕을 다루고 있고, 도와 덕은 각각 우주의 근본원리와 도의 작용을 의미한다.


그럼 대체 '도'는 무엇일까?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며 도덕경 1장이 시작된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이는 도를 도라고 부르면 사람들은 도라는 말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에, 도를 도라고 하면 그건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무언가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면 사람마다 각각 다른 형태의 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각자 나름대로의 신을 규정하여 자기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신을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본래의 신이라고 할 수 없다. 신이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신에게 이름도 붙일 수 없고 이를 형상으로도 그릴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노자가 말하는 '도'는 영원히 변함없는 절대적인 진리, 우주의 근원적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도는 천지 만물이 분화되기 이전의 것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도 없다. 도는 절대적인 표현이 아니라 뭐라 형언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 뿐, 굳이 설명하라면 무한하게 큰 것이라고 노자는 말했다.


도는 우주의 근원적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내 이름이 마크인데 어떤 사람이 마크라는 이름이 싫다며 나를 마이크라고 불렀다. 그 사람은 나를 마크가 아닌 마이크라고 부르지만 그렇다고 내 자신이 달라질까? 아니다. 이름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그것이 나는 아니다. 그 사람의 본질을 뭐라 설명하거나 이름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물의 본질인 도를 표현한다면 그건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모르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오히려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한 줄 요약 :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



4. 자연으로 돌아가라

그렇다면 노자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을까? 노자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드러난 것만으로 무언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를 선악의 개념에 비유해보자. 절대적인 '선'은 무엇일까? 반대로 절대적인 '악'은 또 뭐가 있을까? 예를 들어 전쟁을 하고 있는 A와 B라는 나라가 있다고 해보자. 이때 어떤 사람이 A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면 이는 A 나라의 입장에서는 선이지만, 반대로 B 나라에서는 악이 된다. 이처럼 선악의 개념은 상대적이다.


더 나아가 밝음과 어둠도 절대적으로 둘로 나눌 수 있을까? 노자는 이 또한 상대적이라고 한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늘 맑은 날일 수 없고, 늘 비바람 몰아치는 날일 수도 없듯이, 이 또한 상대적이다. 한국의 밤은 미국의 낮이고, 한국의 여름은 호주의 겨울이다.


이와 같이 선악은 상대적이며, 유무도 상대적이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도 상대적이다. 길고 짧은 것도 상대적이고, 높고 낮음도 상대적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앞과 뒤, 있음과 없음과 같은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서로 상반되는 양극과 같은 것인데, 노자는 이 또한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들의 차이는 모두 상대적이다.


이 세상 모든 사물과 현상은 상대적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고정된 모습으로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매 순간 변하고 있다. 하늘도 땅도 물도 우리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 변한다.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아름다운 꽃동네로 보이고,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불결하고 추한 동네로 보인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 추한 것이며, 선한 것은 사실 악한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은 우리가 어떤 마음의 눈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노자는 사람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상대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분별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사물을 보고 아름답다고 분별할 때는 그보다 아름답지 못한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둘을 비교하여 어떤 사물을 아름답거나 못생겼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상대적인 한계가 있다고 한다. 노자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노자는 상대적인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나의 편견 때문에 상대를 악의 축으로 구분하고, 적과 나를 구분하여 적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 말자. 자신을 보지 못하면 남의 잘못과 부족함만 눈에 띄게 마련이다. 상대적 옳음이나 아름다움은 모두 나의 분별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분별심을 버리는 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고 자연이다.


- 한 줄 요약 : 상대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별심을 버리는 것이 자연이다.



5.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이겨라

노자는 남을 이기는 것은 힘 있다 하고, 자기를 이기는 것은 강하다 했다. 이는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세거나, 무술을 배우거나, 공부를 잘하면 되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는 욕망을 이기고 감정을 이겨야 한다는 뜻이다.


해야 할 일을 위해 마음을 이기고, 화가 몹시 날 때 참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홀리지 않고,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 욕망과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라고 노자는 말했다. 노자는 사람들에게 절대 넘치는 일이 없도록 자만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한 사람이 성공을 거두어 명예를 얻으면, 적당한 때에 물러설 줄 알아야 오래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노자는 절대 넘치는 일이 없도록 자만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들은 쾌락 쫓기를 멈출 줄 모른다.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가는 것처럼, 하루살이가 불빛에 뛰어드는 것처럼, 쾌락에 한번 젖어들면 그 유혹을 떨쳐내기 어렵다. 하지만 계속해서 욕망을 채우려 하면 결국 자신이 위태로워진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비어 있고 고요하나, 자주 사리사욕에 가려져 사물을 바르게 관찰하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온 힘을 다해 마음을 비우고 잔잔한 상태로 회복시켜야 한다고 노자는 말했다. 욕망을 없애려면 반드시 자신을 돌아본 뒤, 맑고 깨끗한 본래의 자신을 회복해야 한다. 만약 자신을 알고 이기며 스스로 만족하고 성실히 살아간다면, 노자가 말하는 도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 한 줄 요약 :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이기는 것이야 말로 노자가 말하는 도를 얻는 것이다.



6. 물처럼 살아가라

노자는 도와 덕을 갖춘 성인은 물처럼 살아간다고 강조한다. 도를 비유하여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물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도덕경>에는 물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렇다면 물의 어떤 점이 도와 같을까?


첫째, 물은 만물을 키우는 일을 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은 모든 생물에게 베풀면서도 그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성인도 물과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물이 만물을 키우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무언가를 베푼다고 의식하면 곧 허물이 되고, 생색을 내게 되고, 계산을 하게 되고, 마음이 불편해지게 된다.


물은 베풀면서도 그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둘째,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한 물은 한없이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가는 동안 산에 막히고 돌에 막힌다 한들, 이를 탓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간다. 이처럼 성인도 겸손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남과 다투지 않는다.


물은 계속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다.


셋째, 물은 어떤 그릇에 담겨도 그 그릇에 순응한다.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되고, 네모진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된다. 어떤 상대도 거스르지 않고 밀어내지도 않는다. 성인은 마음이 늘 비어 있어 어떤 생각도 받아들이고,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성인은 고정된 신념이 아닌 유연한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물은 어떤 상대도 거스르지 않고 밀어내지도 않는다.


넷째, 물은 더러움을 씻어준다. 우리는 세수와 목욕도 물로 하고, 청소도 물로 하고, 세탁도 물 없이는 못한다. 물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정화 작용이다. 기독교에는 세례 의식이 있고, 힌두교도들은 일생을 마칠 때 갠지스 강으로 가서 목욕하며 죄를 씻는 의식을 한다. 새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고, 보다 나은 새로운 삶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물은 만물의 더러움을 씻어주면서도 그 더러움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그러면서도 눈살 한 번 찌푸리는 법이 없다.


물은 더러움을 씻어주면서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는다.


도덕경 20장의 "도는 바다와 같다"는 말도 이와 같은 뜻이다. 바다는 이 세상 모든 물이 흘러들어와도 불평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좋은 물, 나쁜 물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다. 성인도 물과 같아서 높이 있어도 남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고 권위 또한 느끼지 않으니 불편할 일이 없다. 물을 본받으면 다툼이 없어지고, 남을 이롭게 하면서 도와 가까워진다.


그렇다고 물이 부드럽고 겸손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도덕경 78장에서는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은 없지만, 굳세고 강한 것을 치는 데는 물을 이길 것이 없다"고 했다. 아무리 단단한 돌도 빗방울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면 결국 구멍이 뚫리게 된다. 물은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지루해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성을 다한 결과를 보여준다.


끝으로 도덕경 마지막 81장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 선한 자는 말을 잘 못하고, 말을 잘하는 자는 선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남을 위함으로써 내가 더욱 있게 되고, 남에게 줌으로써 내가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위할 뿐 다투지 않는다."


- 한 줄 요약 : 물을 본받으면 다툼이 없어지고, 불편할 일이 없다.


* 참고자료

(1) 도덕경 - 노자

(2) 노자 도덕경 - 최훈동


* 밴드 : https://band.us/@knowledge

* 유튜브 : https://bit.ly/2XOPktn

* 2분뉴스 : https://band.us/@twomi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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