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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좋아 Sep 27. 2024

[단편소설] 그릇 공장

홀로된 엄마와 중학생 두 아들의 이야기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작은 개천이 흘렀다. 그 개천 옆에는 제법 규모가 큰 사기그릇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는데 우리 엄마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그곳에 다녔다. 공장 주변은 잡초만 무성한 나대지였는데 온갖 종류의 깨진 사기그릇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수풀 사이를 걷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날카로운 파편이 운동화 밑창까지 뚫고 들어왔다. 엄마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형과 나는 그 파편들을 주워서 개천에 물수제비를 뜨곤 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동네 남자아이들과 함께 마치 멀리뛰기 선수가 된 것 마냥 멀리서부터 달려와 개천 사이를 한 번에 뛰어넘곤 했다. 우리는 경쟁적으로 폭이 더 넓은 쪽에서 시도하다 결국 운동화가 진흙 바닥에 푹 빠진다. 당시엔 운동화가 더러워져 엄마에게 혼날 걱정이나 발을 헛디뎌 발목을 접지를 염려는커녕 그 누구보다 더 멀리 뛰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한번 물에 발이 빠지면 그때부터는 이판사판이 돼서 개천에서 멱 감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물에 젖은 생쥐 같은 꼬락서니를 보고 빗자루로 종아리를 때리며 혼냈는데 그때만 잠깐 무서웠을 뿐 엄마가 차려준 저녁밥을 먹을 때면 나는 형에게 맛있는 반찬을 뺏기지 않으려고 밥을 빨리 먹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봤자 간장에 조린 감자나 들기름에 무친 콩나물뿐인 밥상이었지만. 중학교에 다닐 무렵 시에서 개천을 덮고 그 위로 도로를 내었다. 나는 그 도로를 보고 내 어린 시절 추억이 콘크리트로 덮여 버린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지만 이제 물에 빠지며 놀 나이는 지나서 별로 상관이 없다는 양가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 도로가 생기기 전에 그릇 공장은 벌써 망해서 엄마는 직장을 잃은 상태였다. 시장에만 가면 값싼 플라스틱 그릇들을 손쉽게 살 수 있게 된 1990년 대 초반의 일이었다. 무겁고 비싼, 게다가 한 번 이가 나가면 볼품없어지는 사기그릇들은 점점 수요가 줄었다. 망한 그릇 공장은 언젠가 일부 벽이 헐리더니, 남은 벽마저 온갖 낙서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글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도형들, 남녀 성기와 함께 성행위를 묘사하는 춘화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겨울을 한 번 지나는 동안 공장은 지붕이 내려앉으며 커다란 흉가처럼 변해갔다. 엄마는 그 근처를 지날 때면,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망해버린 그 공장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엄마가 그 공장에서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도 화력발전소에 다니던 아빠가 기계에 끼어 죽은 후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네 살 때의 일로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두 살 위인 형은 그날의 소동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가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다고, 그러나 그 후론 엄마가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고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결국 공장은 허물어졌고 공장 터와 그 주변 대지에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더니 주공 아파트가 들어섰다. 난생처음 본 대단지 아파트였다.


우리 동네는 개천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었는데, 형과 나는 그런 것을 무시하고 공장이 있던 쪽을 공장 마을이라고 불렀다. 공장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관습적으로 부르던 그 말은 쉽게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무렵 엄마는 아빠의 사망보상금으로 아파트 상가를 분양받아 장사를 시작했다. 비디오와 책을 빌려주는 대여점이었다. 당시엔 그런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겼는데 훗날 공장 마을에 시에서 가장 큰 대여점이 생기기 전까지 장사가 그럭저럭 잘 되었다. 덕분에 나는 보고 싶은 영화를 실컷 볼 수 있었다. 하교 후에 엄마 가게에 들러 일을 거들어주는 척하다가 여러 비디오테이프들 사이에 '애마부인' 같은 야한 영화를 끼워서 가방에 넣고는 개천을 덮은 도로를 건너 서둘러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왔다. 연초부터 목소리가 갈라지더니 제법 굵은 소리가 나기 시작한 중학교 일 학년 봄 무렵의 일이었다. 혼자 야한 영화를 보며 바지를 내리고 이제 막 거웃이 자라나기 시작한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형이 들이닥치면 황급히 비디오를 끄고 바지를 올려야 했다. 형은 야한 영화 따위를 보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형은 엄마 몰래 비디오테이프들을 복사해서 학교에서 팔고 있었다. "야,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너도 뭔가 좀 생산적인 일을 해라." 형이 텔레비전 앞에 누워있는 나를 발로 힘껏 밀며 말했다. 당시에 나는 '생산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몰랐다. 예전에 무너진 공장 벽 안쪽으로 보이던 새빨간 색으로 칠해져 잊히지 않는 '생산량 증대' 같은 문구가 떠올랐다. 공장에서 똑같은 사기그릇을 여러 개 만들 듯, 형은 불법 복제를 통해 비디오테이프의 생산을 증대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완력으로는 도저히 형을 이길 수 없었기에 비디오 플레이어를 넘길 수밖에, 아니 '생산량 증대'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엄마는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엄마 나이가 기껏해야 마흔을 갓 넘겼을 것이다. 아빠가 죽고 십 년간 독수공방했으니 남자를 만나는 게 대수겠느냐마는 나는 아침마다 화장을 하고 입을 옷이 없다고 한탄하던 엄마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엄마는 가게를 막 열었을 당시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했으나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야간에 알바를 쓰기 시작했다. 형과 내가 엄마의 연애를 눈치챈 것은 엄마가 밤 시간에 가게에도 집에도 없었던 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나에게 엄마의 연애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고 말했다. 아무도 없었지만 누가 들을세라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 사장이야. 그릇 공장." 나는 제일 처음에 그의 얼굴보다 대머리가 떠올랐다. 값싼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이 대중화되기 시작해서 언제고 망할 운명이었지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그릇 공장을 망하게 한 그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많이 들었다. 특히 밀린 임금 때문에 걸핏하면 드잡이에 시달려야만 했다. 얼마인지 몰라도 엄마 또한 못 받은 돈이 있었을 것이다. 공장 터가 팔리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서야 그는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대 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 마을에서 장례식을 성대하게 열었다고 들었다. 마침 중복과 말복 사이의 푹푹 찌던 한여름이어서 마을에서 큰 개 한 마리를 잡았고, 개장국 한 그릇씩 얻어먹으려던 조문객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는 장성한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는데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서인지 어렸을 때 동네에서 어울려 놀았던 기억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어릴 때 공장 주변에서 놀고 있을 때면 우리를 내쫓던 고약한 인상을 가진 안경을 쓴 아줌마였다. 그녀가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아마 그와 별거를 하거나 이혼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형은 그 아저씨가 이제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다고 비아냥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쌈박질이 일어나는 중학교 일 학년 교실과 달리, 중학교 삼 학년이면 이미 주먹 서열이 다 정리돼서 싸울 일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형이 학교에서 누군가와 싸우고 돌아왔다. 붉게 상기된 뺨에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희미하게 보였고 아랫입술이 터져서 빨개 보였으며 교복 셔츠의 단추가 몇 개 떨어져 나갔다. 나는 형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어떤 새끼가 화질이 불량이라고 반품해달라고 하잖아." 형이 씩씩대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그 새끼 볼 거 다 보고 그러는 거야. 아 씨발, 내가 품질 관리를 얼마나 신경쓰는데. 근데 그 좆만한 게 선빵을 날리대. 그래서 존나게 패줬지." 형이 내 앞에서 '원투'하고 주먹을 내지르며 말했다. 나는 예전 그릇 공장 벽에 쓰여 있던 '일등 품질'이라는 빨간색 문구가 떠올랐다. 아무리 품질이 일등급이어도 망할 수 있는 게 세상의 논리였다. 이번 사건은 형의 비디오테이프 사업도 어쩌면 그런 운명을 타고났음을 알리는 전조증상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 때문에 기어이 엄마가 학교에 불려갔다. 형의 싸움 때문은 아니었다. 형은 엄마 몰래 실과 바늘을 꺼내 교복에 단추를 달았고, 마치 여드름을 짜서 그런 것처럼 볼에 밴드를 붙여 멍을 가렸으며, 엄마 앞에서는 애써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가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교에 오가는 날들이 반복되다가 며칠 후 일이 터졌다. 불시에 삼 학년 전체를 운동장에 세워 둔 뒤, 학생부 교사들이 각 반을 돌며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다. 담배를 찾기 위한 검사였는데 형의 비디오테이프들이 이 반 저 반에서 발각됐다. 한데 모인 테이프들에는 같은 필체로 'EBS 수학', 'EBS 국어', 'EBS 영어'라고 쓰여 있었으니 이런 일에 베테랑인 학생 주임으로서는 비디오를 재생시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는 안 봐도 비디오다. 그날 운동장에서 다리를 떨며 서있던 형은 교무실로 불려갔고, 이튿날에는 엄마가 학교에 와야 했다. 형이 한 짓에 대해 알게 된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서 “누가 너보고 돈 벌라고 그랬어? 용돈이 필요하면 엄마한테 얘기 해.”라고 소리 지르며 형을 꾸짖었다. 형은 순간적으로 눈에 힘을 주며 엄마를 노려보더니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정학을 받을 뻔한 형을 엄마의 애인인 전직 그릇 공장 사장이 구해줬다. 그 아저씨가 학생 주임과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한순간에 사업이 망해버리자 형은 한동안 좌절하더니 다른 사업에 도전했다. 그건 바로 연애 사업이었다. 당시 나는 하교 후에 시내에 있는 어느 단과 학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듣고 있었다. 엄마가 형도 같은 학원의 강의를 끊어줬으나 형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시내는 대로 두 개와 두 대로의 사이를 잇는 복잡한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가 다닌 학원은 대로변에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멀리서 형이 어떤 여자와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시내에 학교가 몇 개 없기 때문에 교복만 보면 어느 학교인지 다 알 수 있었는데, 형의 손을 잡은 여자는 놀랍게도 황갈색, 그래서 똥색으로 부르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똥색 교복은 우리 시내에서 여고밖에 없었다. 형은 당당하게 나와 같은 군청색 남중 교복을 입고 그녀와 걷고 있었다. 당시에는 연상연하 커플이 매우 드물었기에 나는 형이 왠지 모르게 어른스러워 보였다. 여자는 키가 아담했고 얼굴이 동그랬으며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불그스레한 뿔테안경을 쓰고 있어 형과는 다른 분위기가 났다. 형이 나를 보고는 여자에게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실제로는 이렇게 말했다. "내 쫄따구야." 여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웃으며 형이랑 닮았다고 말했다. 나는 어색해서 "갈게" 하고 말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형과 그녀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돌아온 형은 애인이 여고생이라서 놀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속마음과 달리 "아니"라고 말했다. "나이는 같아. 걔가 생일이 빨라서 그래." 형이 말했다. 그때 엄마가 귀가하는 소리가 들리자 형은 입에 검지를 대며 내 입단속을 시켰다. 형도 엄마처럼 비밀 아닌 비밀 연애 중이었다. 


형의 비디오테이프 사업이 실패하자 나는 왠지 모르게 야한 영화 보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대신 나는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학원 수업은 선행 학습으로 이뤄졌는데 집중해서 들으니 이해가 잘 되었다. 그러자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니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학교 수업은 복습하는 거나 다름없었는데 같은 과정을 두 번째로 들을 때는 여유가 좀 생겨서 교과서 외에 참고서를 펴고 같이 읽었다. 1학기 기말고사 성적이 중간고사 때보다 월등히 나아졌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받은 성적표에 사인을 받기 위해 엄마에게 보였을 때 표정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으로 인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뿌듯함이 뭔지 알았다. 그 후로 엄마는 가끔 나만 데리고 시내로 가서 외식을 했다. 어차피 형은 여자친구와 노느라 집에 잘 붙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우리 둘만 외식을 하고 온 지도 몰랐다. 맞선 보는 장소로 잘 알려진 시내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나를 데려간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엄마는 벌써 누구랑 몇 번 와봤는지 식당 안 상황과 메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햄버그스테이크를 시켜주고 엄마는 안심스테이크를 시켰다. 나는 미국 영화에서나 보던 스테이크라는 음식이 정말 맛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는 형의 여자친구에 대해서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엄마도 형의 여자친구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왜? 엄마가 모를 줄 알았니?"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잘 몰라." 실제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대화들을 나누며 나는 엄마와 한결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는데 그만큼 형에게 미안한 감정도 생겼다. 


여름 방학이 되었지만 형은 여전히 밤늦게 집에 들어오곤 했다. 전과 달리 옷차림에 신경 쓰는 모습이며 머리에 스프레이까지 뿌리는 걸로 봐서 그 여고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형 몰래 엄마와 외식을 하러 나갔던 어느 무더운 날이었다. 시내에 새로 문을 연 일본식 돈가스와 메밀국수를 파는 식당에 갔다. 정식을 시키면 둘 다 먹을 수 있었으므로 우리는 정식 2인분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식당 문이 열리더니 그 아저씨가 들어왔다. 엄마 애인이자 엄마의 전직 사장. 아저씨는 엄마를 발견하더니 얼굴에 웃음을 보이며 곧장 우리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아저씨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장 차림이었는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넓게 벗어진 이마와 코에 흐른 땀을 닦았다. 약속된 만남이었는지 엄마는 나와 달리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엄마 친구야." 두 사람이 동시에 나에게 말했다. 나이가 열 살은 족히 차이나 보이는데 친구라니, 어불성설이었다. 음식이 나오자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아저씨는 곧바로 같은 걸로 시켰다. 엄마와 나는 말없이 음식을 먹었고, 아저씨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아저씨였다. "엄마가 그러는데 공부를 참 잘한다고."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입안에 든 음식을 씹었다. "계속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만 가면 아저씨가 장학금으로 등록금 대줄게."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 엄마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싫지는 않았는지 호호 웃었다. 나는 여전히 말은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중학교 일 학년 여름은 비가 많이 내렸다. 장마가 끝나고도 물 폭탄을 퍼붓듯이 소나기가 내렸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나는 어릴 적 어느 날이 생각난다. 예전에 개천 위로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공장 마을로 가는 하나뿐인 다리 위까지 물이 넘실거렸다. 흙탕물이 한바탕 지나간 뒤에는 다리 위에 토사와 꺾어진 나뭇가지, 온갖 쓰레기들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지금은 비가 많이 내려도 도로 밑에 깔아둔 집채만 한 파이프를 통해 물이 흘러 시를 가로지르는 강으로 합류한다. 엄마가 그릇 공장에 다니던 시절, '잔업'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형과 나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밤에 다시 공장으로 간 적이 종종 있었다. 그날따라 밤에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해서 형과 나는 우산 없이 공장에 간 엄마가 걱정되었다. 우리는 노란색 우비를 입고 엄마에게 가져다줄 우산을 들고 다리를 건너 공장 마을로 향했다. 엄마가 언제 퇴근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공장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다가 형이 공장 옆으로 돌아가서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고 뛰었다. 그래도 안 보였는지, 나보고 창문 아래에 엎드리라고 했다. 나는 형의 '쫄따구'답게 형에게 등을 내주었다. 내 등을 밟고 올라선 형은 이내 내려왔다. "아무도 없어." 형의 말에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장 안에는 잔업을 하고 있는 엄마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엄마에게 우산을 건네주고 '우리 아들 효자네' 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형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다른 창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며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엎드려야만 했다. 형은 내 등 위에서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형, 엄마 보여? 나 힘들어." 내가 징징대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내려왔다. "엄마 봤어?" 내가 물었지만 형은 얼굴이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 집에 가자고 했다. "왜, 엄마 기다려야지." 내가 형의 손을 뿌리치자 다시 내 손을 꼭 붙잡고 무작정 다리 쪽으로 향했다. 내가 저항하자, 자기는 갈 거니까 여기에 있든지 말든지 하라고 소리쳤다. 나는 울먹이며 형을 따라나섰다. 형이 창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날 이후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묻고 싶을 때마다, 내리는 빗물마저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힘을 줘 꽉 다문 형의 입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날 집에 도착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일 밤처럼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잠결에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를, 그러니까 사기그릇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엄마는 잔업을 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공장에서 그릇들을 박스에 담아 많이 가져오곤 했는데, 그것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싸게 팔아서 부수입을 올렸다. 


유난히 덥고 비가 많이 내렸던 그해 여름 방학이 끝나고 우리는 학교로 돌아갔다. 겨울에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형은 학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내에는 인문계 남자고등학교가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한 개는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까운 학교로 진학하려면 입학 고사를 통과해야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고등학교가 형이 만나는 누나가 다니는 여고와도 가까웠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만 하는 동기부여가 되었을 것이다. 형의 모의고사 성적은 시험 당일의 컨디션에 따라 합격 또는 불합격이 될 수 있는 경계에 있었다. 형은 학원이 끝나고도 집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9월의 어느 날, 남쪽에서 커다란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텔레비전을 켜기만 하면 나오는 일기예보에서 비를 많이 뿌리고 바람도 거셀 거라고 했다. 당일이 되자 오전부터 내리는 비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시내를 관통하는 강이 범람해서 가장 큰 다리마저 집어삼켰다. 학교에 있던 형과 나는 집에 갈 수 있는 길이 막혔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교에서는 비상조치를 내렸다. 오후 수업은 모두 취소되었고 보호자가 데리러 오는 학생만 귀가조치 되었다. 다리가 물에 잠겼기 때문에 그 건너편에 사는 학생들은 집에 갈 수 없었다. 학교 측에서는 귀가할 수 없는 학생들을 모아 그날 밤 체육관에서 재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더니 다행히 범람했던 강의 수위가 다리 아래까지 내려갔다. 저녁이 다 된 시각에 엄마가 아저씨의 차를 타고 형과 나를 데리러 학교에 왔다. 우리는 아저씨의 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다리를 지나갈 때 그 아래로 넘실대는 흙탕물이 보이자 나는 무서워졌다. 이제껏 강이 이렇게나 범람했던 적이 있었던가?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떠드는 나와 달리 형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 시절 비가 아주 많이 내렸던 어느 날, 공장의 창문 안을 들여다봤던 그날의 형처럼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날 밤 형은 엄마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독서실에 가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뉴스에서는 전국의 홍수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도하고 있었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얼마나 더 올지 몰라서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고 하늘엔 먹구름만 가득했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경찰관 두 명이 찾아와서 초인종을 눌렀다. 엄마는 영문을 모른 채 문을 열여 줬고 형과 나는 밥상에서 물러나 엄마 뒤에 섰다. 경찰은 형의 여자친구가 어젯밤 실종되어서 조사할 게 있으니 경찰서로 같이 가자고 말했다. 엄마와 나는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형은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며, 어젯밤까지 독서실에서 같이 있었다고 경찰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울상이 된 형과 함께 경찰들을 따라갔고, 나는 학교에 가야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그날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딴생각을 했다. 그러다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께 사건의 실마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좀 전에 여고생 시신 한 구가 바다와 접하는 강 하류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어젯밤 우리 동네에 있는 개천 위 도로를 걸어가다 지반 침하로 인해 바닥이 푹 꺼져버렸다고. 형의 여자친구는 그대로 급류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간 모양이다. 담임 선생님은 시내 곳곳이 위험할 수 있으니 하굣길에 모두 조심하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 누나의 옷은 거의 찢겨 몸 이곳저곳에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고 한다. 


형은 여자친구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좀처럼 매지 않던 교복 넥타이도 똑바로 맸다. 밤새 울었던 흔적을 감추기 위해 눈물은 닦았지만 눈두덩이 퉁퉁 부었고 눈알이 충혈되어 있었다. 오후에 장례식에서 돌아온 형은 아무런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안에 들어가서 마치 넋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방바닥에 앉아 있는 형 옆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긴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나였다. 나는 하필 그때 왜 그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 비가 많이 내렸던 날, 잔업을 나간 엄마에게 밤에 우산을 갖다주러 형과 함께 공장에 갔던 일. 그 후로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던 그 일에 대해서 형과 얘기하고 싶었다. 그날 형이 창문 안에서 무엇을 봤기에 나를 끌며 집으로 되돌아왔는지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형은 내 말을 다 듣고도 묵묵부답이었다. 뭔가 말을 꺼내려다 멈추고 다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입을 연 형은 내 물음과 상관없는 말을 하였다. "너, 여자 가슴 실제로 본 적 있어? 영화에서 말고 실제로."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형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날 밤, 여자친구가 자기 가슴을 보여줬어. 그날 독서실에 우리밖에 없었어. 그 물난리에 누가 공부하러 왔겠어. 여자친구가 나를 독서실 옥상으로 불러내더니 가슴 보여주면 공부 열심히 할 거냐고 물었어. 전부터 내가 보여달라고 졸랐거든. 내가 그러겠다고, 반드시 집 근처 남고에 합격하겠다고 했더니 셔츠 단추를 풀고 브래지어를 풀어서 가슴을 보여줬어.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젖꼭지가 선홍빛이었어.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 손을 내밀었는데, 안된다고, 그냥 보기만 하라고 그랬어. 그래서 잠자코 보고만 있다가 여자친구가 다시 옷을 입었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형은 입을 앙다물고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형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되려 그게 뭐냐고,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형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고 웅얼거렸다. "안전제일." 나는 잘 못 들어 다시 물었다. "뭐였다고?" "창 안쪽 사무실 벽에 빨간색 글씨로 '안전제일'이라고 쓰여있었어." 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씨발, 안전한 게 제일인데." 형은 욕을 내뱉더니 다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안전제일'이란 말을 되새김질했다. 나는 죽은 여자친구 때문에 형이 미쳐버린 건 아닌지 염려됐다. 그때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는 앉아 있는 형을 보자마자 자세를 낮춰서 껴안았다. 형은 엄마의 품속에서, 내내 참아왔지만 내 앞이라서 차마 낼 수 없었던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동안 형의 가슴속을 메우고 있던 형언할 수 없던 갖가지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우는 형을 끌어안고 ‘괜찮아, 괜찮아.’하며 연신 등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나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형의 울음소리와 엄마와 형이 서로 껴안은 낯선 광경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날 우리 세 사람은 오후 내내 그 방에 함께 있었다. 나는 뭐라고 콕 집어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날 이후로 형과 엄마의 사이가 조금은 좋은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전제일'은 '생산량 증대'와 ‘일등 품질’에 이어 형에게 남은 인생의 모토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형은 여자친구와의 약속대로 집 근처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그 후로 삼 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공부해서 서울의 한 사립대의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지금은 고향 근처 광역시의 한 중학교에서 교육공무원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언젠가 불법 복제 비디오테이프나 팔던 형이 학생 주임 교사가 되었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엄마는 형과 내가 고등학생 때 그 아저씨와 재혼해서 고향에서 살았다. 그 아저씨는 간암으로 고생하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저씨는 약속대로 형과 나의 대학 등록금을 대주었으나 엄마의 돈인지 아저씨의 돈인지 알 길은 없었다. 엄마는 가끔 손주들을 보러 형네 집에 오가다가 근래엔 기력이 쇠하여 차츰 왕래를 줄였다. 이제 형과 나는 엄마를 보려면 고향에 갈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고향에 가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형과 내가 뛰어놀던 개천과 그릇 공장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가끔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는 형의 모습을 보며 나는 형도 뭔가를 떠올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가 많이 내리던 그날 형이 공장의 창문 안으로 본 게 '안전제일'뿐만이 아니라고 의심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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