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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좋아 Oct 07. 2024

수불석권 (手不釋卷)

짧은 소설

요즘에 지하철 안에서 책 읽는 사람을 만나기는 같은 칸에서 외국인을 찾는 것보다 어렵다.

지하철을 타면 다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 바쁘지만 나는 꿋꿋이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읽는다.

어려서부터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자성어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이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나는 한때 문자 그대로 잘 때에도 책을 손에 쥔 채 자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침대 밑에서 심하게 구겨진 책을 발견하고는 그만 두었지만.


나는 생뚱맞게 어느 한 가지가 궁금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현재 읽고 있는 책을 지하철 안에서 읽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어제 읽은 책도 아니고, 내일 읽을 책도 아닌 바로 오늘 내 가방 속에 들어있는 그 책을 읽고 있는 사람 말이다.

근래에 유행하는 베스트셀러를 읽는다면 가능성이 조금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랍시고 서점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기만 하면 많이 팔릴 거라는 얄팍한 상술에 놀아나는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주로 고전문학들이다.

시대적 평가가 끝난 현대문학도 괜찮지만, 현대까지 살아남은 고전문학에 비할 바 못된다.

고전문학을 읽지 않는 자들은 진정한 독서인이라 할 수 없다.

그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일 뿐.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바로 그 일이 오늘 실제로 일어났다.

지하철을 타고 외근 나가던 중에, 독서 모임에서 이번 달에 선정한 도서인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있었다.

낮 시간이라 지하철 안이 한산해서 앉을 수도 있었지만, 늘 그래왔던 대로 서서 책을 읽었다.

대각선 좌석에서 들려오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곁눈질을 했더니, 누군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게 아닌가?

나의 시선은 책 제목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꽂혔다.

그 순간 심장이 쿵덕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일 아닐지 몰라도 나는 몹시 흥분했다.

혹시 같은 독서 모임 회원인건가?

내 시선은 서서히 책 너머 책 주인으로 옮겨갔다.


아줌마.

그것도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안경 쓴 아줌마.

나는 당황했다.

왜 내 상상 속에서는 매번 젊고 예쁜 여자만 등장했던 것인가?

그래도 머릿속에서 연습했듯이 이 대단한 우연을 핑계로 말을 한번 걸어볼 것인가?

아, 망설여진다.

이모뻘인 아줌마와 대화해 본 적이 없는데.

사실 나는 이모도 없지 않은가?

그 아줌마는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 지 아직 보지 못했다.

혹시나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릴까봐 읽던 책을 슬그머니 내린 채 손에 쥐고만 있었다.

손가락 땀이 책장에 스며들고 있었다.

어떡하지?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옆에 서있던 여자가 쓰러졌다.

사람이 픽 쓰러진다고 하는 표현은 책에서만 읽었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손 쓸 새도 없이 쓰러지는 그녀를 그저 바라만 보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였지만 굉장한 미인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얼른 앉아서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괜찮으세요?”

사람들이 우리 주변으로 몰려왔다.

그녀는 정신이 들었는지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몸에 힘을 줘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그때 지하철이 정류장에 도착해서 문이 열렸다.

그녀는 열린 문으로 곧장 내렸다.

그러더니 음료 자판기에 기대어 다시 주저앉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 내렸다.

“괜찮으세요?”

나는 다시 물었다.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빈혈 때문에 그렇다며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나는 옆에 있는 음료 자판기에서 생수 한 병을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고마움의 표시로 살며시 목례를 하고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는 그녀의 흰 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와 잘 되었냐고?

사실 그녀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올 때까지 옆에서 같이 기다려주었다.

남자친구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다시 지하철에 올라탔을 때, 그제야 아까 지하철에 두고 내린 책이 생각났다.

다 그 여자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책을 되찾은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그 일이 있고나서 며칠 후 나는 서점에 갔다.

그곳의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버젓이 내 책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베스트셀러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책에 작은 포스트잇으로 내 이름과 함께 ‘책 찾아 가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책을 사면 날짜와 구매한 장소를 내지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다.

내 이름도 함께 적어 둔다.

누군가 지하철에서 내 책을 주워서 여기로 가져온 것이 틀림없다.

기쁜 마음에 나는 점원을 불러 내가 책 주인이라고 말했다.

점원은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책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책을 열자 익숙한 내 필체 옆에 작게 다른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전철 안에서 주웠는데, 저도 마침 같은 책을 읽고 있어서 신기했어요.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으면 연락주세요. 신O현 010-983X-974X’

그 아줌마다.

망... 망설여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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