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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돌 May 05. 2020

도깨비 같은 길 같으니라고 1

[트레킹 이야기] 강릉 바우길 12구간 '주문진 가는 길' 


오늘은 목요일.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1구간과 4구간을 걷고 어제 수요일은 하루 쉬었다. 초반부터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화요일에 걸었던 4구간의 종점인 사천진리 해변공원에서 갈 수 있는 길은 5구간과 12구간. 5구간 '바다호숫길'은 해변을 따라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 경포대를 거쳐 남항진 해변까지 가는 길이다. 반면 12구간은 위쪽 해변을 따라 걸어 주문진까지 올라가는 길이다. 위쪽부터 걸어보기로 한다.


바우길 안내 책자를 보니 준비물은 간식과 물, 딱 두 가지다. 이 얘기는 12구간에는 먹을 곳이 널려있다는 것. 부담이 덜하다. 가방은 가볍게 지갑은 두툼하게 준비한다.

강릉 시내에서 타고 온 313번 버스에서 내려 사천진리 해변공원으로 달음질한다. 해변 앞 편의점으로 직행. 커피를 사서 사천 바다로 나가 아침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인증샷도 찍어본다. 바닷길을 처음 걸어서인지 들뜨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포토스팟은 왜 이리도 많은지 속도가 나지 않는다. 사천 해변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하... 이 길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겨우겨우 사천해변을 벗어나 산책로로 진입한다. 바닷길을 걷고 있다는 건 바다를 직접 바라보며 걸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해양생물연구교육센터, 강원도수산자원연구원 등 바다 관련 기관들의 이정표가 연이어 나타난다.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일터가 많은 곳. 나는 바다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변 인도를 따라 한참을 걷다 보랏빛 맥문동이 그득한 해송 숲 산책로를 만난다. 연곡해변 솔향기 캠핑장을 지나 빨간 등대와 갈매기 무리를 바라보며 영진교를 건너자 바우길은 바다가 아닌 솔숲으로 이어진다.


좀 전 영진교를 건너면서 어디로 가야 하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좌측 도로 건너 길바닥에 빨간색과 흰색의 두 줄 바우길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도로를 건넜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땅바닥을 다시 확인. 이내 바우길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우길 표시로만 알고 길을 건넜는데, 그 표시는 다름 아닌 '목장갑'이었던 거다. 빨간색으로 코팅된 부분과 장갑의 흰 부분이 만들어낸 절묘한 바우길 표식.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며칠째 눈에 불을 켜고 바우길 표식을 쫓아 걷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자위해본다.


잘못 건너온 건가 싶어 지도를 확인해본다. 다행히 이쪽 방향인 건 맞나 보다. 제대로 된 바우길 표시를 보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다. 걷다 다시 돌아본다. 다시 봐도 목장갑이 맞다. 이렇게 미쳐가나 보다. 바우길에.



"에휴, 산길을 올라야 하나 봐."


이번엔 한숨이다. 목장갑 때문에 헛웃음을 뱉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허파에서 숨 덩어리가 새 나가는 기분이다.  걷기로 마음먹고 바우길 위로 두 발을 올려놓았지만, 올라야 하는 산길은 여전히 반갑지가 않다. 그래도 뭔가 대단한 게 있으니 이 산길을 오르라는 게 아닐까? 산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영진리고분군'에 대한 글이 쓰여있다. 이거구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만들어진 무덤과 그곳에서 나온 신라 토기에 대한 설명이었다.  산을 오르니 신라시대 이후 해변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토성이 축조된 흔적에 대한 설명이 담긴 안내판도 보인다. 해변을 포기하고 뜬금없이 산길로 진입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뾰로통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멋진 풍광만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이 길 위에 숨 쉬고 걷고 달렸던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숨결을 함께 느껴보는 것이라고.




"우와, 보헤미안이 여기 있는데!"


10시. 홍질목 추어탕집 앞에 섰다. 식당 앞 갈림길에 'BOHEMIAN'이라고 서 있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이 카페는 차를 타고 서너 번 온 기억이 있다. 바우길을 걷다가 이 곳을 지나갈 거라고는 전혀 예측을 하지 못한 터라 놀랍기도 하고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여기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들렀다 가자."


그는 '파나마 게이샤'를 선택. 힘들게 걸어온 터라 나는 시원하고 달달한 커피를 먹고 싶어  '아이스 카페오레'를 주문한다. 파나마 게이샤를 담은 커피잔 안팎에는 해바라기가 그득하다. 커피 받침에도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져 있고 VAN GOGH라고 쓰여있다. 비싼 값을 하는 커피답게 한 모금을 마신 그의 미간이 그 맛이 꽤나 만족스럽다고 말해준다. 카페오레는 손으로 빚은 듯한 사각 질그릇에 담겨 나왔다. 한가운데 새까맣게 탄 엿 빛깔을 한 얼음이 세 알 동동동 떠있다. 달달한 시럽은 자그마한 비커 모양을 한 작은 컵에 들어있다.


"어, 미숫가루 커피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키득거리고 웃는다. 바우길을 걸으면서 아침마다 미숫가루를 타서 보냉병에 넣어서 다니고 있는데, 널찍한 대접 모양에 담긴 카페오레 모양새가 마치 미숫가루 같았던 거다. 시럽을 전부 대접 모양 컵에 쏟아붓는다. 직원이 같이 준 자그마한 나무 숟가락으로 찔금 찔끔 먹어본다. 부족하다. 조금 더 달게 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은 걷고 있는 중이지 않은가? 시럽을 더 달라고 부탁했더니 금방 시럽이 든 비커를 갖고 와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 마디를 던져놓고 바로 등을 돌린다.


"그냥 마셔도 돼요."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 보다. 그냥 대접을 양 손에 들고 미숫가루라고 생각하고 마셔야지. 게다가 난 지금 대접을 들고 커피를 벌컥벌컥 마셔도 충분히 이해될만한 행색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반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붉그락 익어가는 볼, 모자에 눌려 지나치게 단정해진 머리카락, 최대한 얌전한 무채색을 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등산복. 한껏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는 다른 자리의 관광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시럽을 대접에 더 부으려고 하는 찰나, 눈뜨고 시럽을 반 이상 도둑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눈앞에 앉아있던 그가 나의 시럽을 자기 입에다가 부어 넣고 있는 것이었다. 너 뭐 하는 거야?라는 눈빛을 발사.


"아... 직원이 이 시럽 그냥 마시라는 줄 알고..."


얼른 뒤돌아 직원이 서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그 사람. 직원이 자리를 뜬 걸 알고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거 봤으면 나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겠다."


'아, 네... 내가 보기에도 당신은 이상한 놈이거든요. 걷다가 더위 잡수셨나 봐요. 내 시럽 내놔. 이 놈아.'



보헤미안을 다시 찾기까지는 사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곡에 있는 이 본점을 처음 찾은 건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오래전. 아이들이 기저귀 차던 시절이었다. 비가 오고 매우 추운 날이었는데, 자리에 앉으려면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우리 가족 말고도 대기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기에 금방 차례가 오지는 않았다. 큰 마음먹고 온 만큼 오래 기다려서라도 커피를 마시고 가고 싶었지만, 우린 그곳을 곧 떠났었다. 추운 날씨에 기다리는 아이들이 힘들어해 초코음료라도 밖에서 좀 먹게 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던 거다. 커피도 사람을 위한 것 아닌가 싶었다. 사람은 뒷전이고 커피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들이 그때는 야속하기도 하고 비위가 상했었다. 그 이후로는 늘 다니던 테라로사로만 더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가기에는 꽤 괜찮은 베이커리가 있는 테라로사가 적당하기도 했다. 물론 커피 맛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을 놔두고 우리 둘만 움직여도 가능한 시기가 왔을 때, 그제야 우리는 보헤미안에 다시 들르기 시작했다. 고작 몇 년 전의 일이다. 첫인상 때문에 다시 찾아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예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은 듯한 모습이어서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테라로사 커피공장 본점이 원래 카페 앞에 새로운 건물을 지으면서 바로 눈 앞에 있는데도 추억이 그득한 예전의 장소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아쉬움을 갖고 있던 터라, 보헤미안 본점의 시골 다방 같은 모습이 고맙기까지 했다. 에어컨 바람에 정신줄을 놓은 것인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있다 보니 11시.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엉덩이를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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