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이야기] 강릉 바우길 13구간 '향호 바람의 길'
아부지는 참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분명 엄마에게는 그랬다. 게다가 돈 버는 재주도 없었다. 그 둘은 다정한 잉꼬부부와는 한 참 거리가 먼 부부였다. 내가 막내를 출산했던 해였다. 산후조리원에서 2주를 지내고 나온 후 다시 2주 정도를 엄마와 함께 보냈다. 한 동안 요양원에 엄마가 얼굴을 보이지 않자, 아부지는 단단히 부화가 나신 모양이었다. 얼마 후 아부지에게 손녀를 보여드리려고 신나는 마음으로 요양원에 갔지만, 아부지는 그 날 인상을 쓴 채 단 한 번도 온화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엄마 말로는 아직도 화가 덜 풀리셨다고 했다. 자식이고 손주고 다 소용없다. 한평생을 투닥거렸어도 곁에 늘 함께 한 배우자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우선인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맞는 말이다! 나도 지금 같이 걷는 이 사람을 위해 한 시간 전에 나무 스틱을 제작했다. 다리가 불편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얼마 못 가 절뚝거리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들고 있던 스틱을 그 사람에게 건넸다. 어제 12구간을 걷고 들렀던 마트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마트에서 그는 자기는 괜찮다며 내가 힘들면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 스틱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나 보다. 두어 번 사양하길래 강제로 손에 쥐어줬더니 언제 사양했나 싶게 손에서 스틱을 놓지 않는 거다. 걷는 모양새를 보니 스틱 하나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길가에 부러져있는 나뭇가지 하나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족족 길이, 굵기, 질감까지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놈으로 하나 집어 들어 잔가지를 발로 밟아 부러뜨리고 적당한 길이로 높이를 맞춘 후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사양도 하지 않고 넙죽 받아 든다.
그렇게 우리는 향호저수지까지 왔다. 때로는 고마워하고 때로는 미안해하며 때로는 천연덕스럽게 마음을 받아주는 그 사람과 함께 걸었다. 그 사람이 지칠만하면 내가 앞서고, 앞선 내가 기운이 빠지면 그 사람이 다시 앞선다. 어떨 땐 뒤따라 오는 내가 더 지칠까 싶어 나를 앞에 세우고 속도를 많이 늦추기도 한다. 서로의 보폭을 확인한다. 서로의 속도를 맞춘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아무런 대화가 없을 때 어쩌면 더 서로의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발을 벗는다. 양말도 벗어 신발 안에 쏙 넣는다. 그 양말 위에 뒤꿈치를 조심스레 올려놓고 다리를 뻗는다. 걷는 내내 불지 않던 바람이 이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불어온다. 발가락을 경망스럽게 움직여 발가락 틈새에 실바람을 넣어본다.
'아, 살 것 같다.'
발등에는 양말 자국이 선명하다. 멍하니 발등을 바라보다 눈길이 저수지로 향한다. 저수지길 밑으로 작은 언덕이 있다. 언덕 위에 핀 노란 꽃이 꽃물을 물에 흐트러뜨린 듯 물의 빛깔이 온통 노랗게 보인다. 노랗다가 흙빛이다가 다시 하늘빛이다. 저수지가 하늘인지 하늘이 저수지인지 알 수 없다. 한 치 흐트러짐도 허용치 않는 완벽한 데칼코마니. 어느 미술관을 간들 이런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겠는가?
야생의 길에서 만난 뜻밖의 선물을 뒤로하고 또다시 걷는다. 제방둑에서 마을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이어지는 임도로 향한다. 역시나 이 길도 야생의 길. 마음의 고삐를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푸는 순간, 어김없이 숲길로 인도한다. 키보다 더 큰 풀들을 헤집고 걷고 또 걷는다. 또 말이 없어진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길을 내며 계속 걷는다. 1시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출발할 때 보았던 향호가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향호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의 내뱉는다. 앞서 걸어가는 그의 다리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괜찮은 건가?'
ABOUT 바우길 13구간 '향호 바람의 길' (출처:강릉 바우길 홈페이지 www.baugil.org)
코스길이 15km (소요시간 5~6시간) 코스 난이도 중급 등산화, 도시락, 간식, 물 준비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주문진 항구에서 파도가 해변의 모래를 밀어 올려 만든 향호와 향호저수지를 크게 한 바퀴 도는 둘레길입니다. 먼 바다의 소식을 안고 불어온 바람이 사계절 호수 주변의 갈대숲을 어루만집니다. 호숫가의 철새와 바람이 안내하는 길을 사람이 따라 걷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되돌아오는 순환코스라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는 도보여행객들에게는 더욱 그만인 코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