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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WRITER Jan 13. 2021

변하는 마음, 변하지 않는 영화

털 수 있는 자가 털어라, 외장하드

영화는 죄가 없다 


이연걸에 심취한 유년기, 홍콩 멜로에 자아를 의탁한 10대 시절까지는 명료했다. 하지만 곧 모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를. 가장 어려운 질문은 늘 '대리님은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 두 번째로 어려운 질문은 '그 영화의 어떤 점을 좋아하세요?'다. 영화 언저리에서 일한 지 10년 째인데, 상대의 호기심에 근사하게 화답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멋쩍다. 상대방의 기대를 적절히 충족시키면서(별다른 기대가 없었을 수도 있다), 너무 아는 척 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아는게 실제로 없기는 하다), 너무 찌든 것 같지도 않은(찌든건 사실), 그런 답변을 내놓기 위해 내 안에서 너무 많은 검열이 작동하는 탓이다. 영원불변의 가치를 지닌, 인류 보편의 삶을 풍요롭게 살찌울 인생의 명작만을 추천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다.


하지만 내게도 변명이 있다. 사랑해 마지않던 인생의 명작들은 내 곁을 지켜주지 않았다. 명작은 그 곳에 있을 뿐이었다. 나와 세계는 나아가고 있었다. 과거를 지키고 있는 영화와, 머물 수 없는 나 사이에선 다툼과 화해가 수도 없이 이어졌다. 영화는 매번 다르게 다가왔다. 일상의 양분이 되어 주었던 어떤 영화가 새 시대의 바른 가치와 멀어지며 나의 뒤통수를 후려치기도 하고, 흐지부지 '일'로 봤던 어떤 영화가 '추석특선'같은 이름으로 저벅 저벅 다시 찾아와 복수하듯 눈물 콧물을 빼놓기도 했다. '네가 좋아하던 그 영화, 나도 봤는데 정말 좋더라' 하는 달콤한 말에 '아, 그러셨어요?^^' 하고 답하지만, 속으론 '아.. 저도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 마음 바뀜. 그 영화 이상한거같음. 아니 걍 이상함. 내가 왜 좋다고 했지? 미쳤나봄' 같은 말을 차마 입밖에 내진 못하고 삼킨 기억도 그래서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저 그 영화 다시 봤는데 괜찮은 것 같아요. 전에 선배한테 혹평한건 점심 못먹고 시사 가서 그런거임. 배에서 소리 나서 집중 못해서임. 혹평을 공식적으로 철회합니다' 처럼 멍텅구리같은 주워담기를 하는 일이 가끔씩 생기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변심이라면 지레 겁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싫어하고, 혹시 마음이 바뀌게 되면, 바뀌게 두면 될 일이다. 영화는 죄가 없다. 변한 건 나니까.  


영화 담당 기자로 7년 일했다. 영화는 주로 기록과 판단을 위한 메모 안에 존재했다. 나는 촌스럽게도 영화와 내가 쇼윈도부부 같은 사이라고 생각했다. 꼬집기만 하느라 통 들여다 볼 틈이 나지 않았다. 투자배급사의 홍보팀 직원으로 3년째 일하고 있다. 이제 영화는 어쨌든간에 가까이 두고 여기 저기 살피며 사랑해주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우선 자꾸 들여다보면 투닥투닥 다투다가도 예쁜 구석이 보이고, 애틋해지기 마련이고, 그 마음 감출 수가 없어지고, "우리 애가 이렇게 예쁩니다!" 동네방네 떠들게 될테니까. 나는 그런 마음으로 영화들을 마주했다. 영화를 뜯어보고, 맞춰보고, 되도록 힘껏 사랑하고, 그 중에도 가장 자랑하고픈 지점들을 품에 안고 내달렸다. 가장 근사한 모습으로 관객에게 가 닿길 바랐다.


외장하드를 털어볼까


지난 영화들의 자료를 보관하는 외장하드는 그런 마음들의 총체다. 저마다 깊은 고민들을 거쳤을 홍보마케팅 전략, 포스터, 스틸, 메이킹까지, 여러 이유로 개봉 당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자료들부터 천만 관객 신화를 일궈낸 전술들까지 다채롭다. 짧게는 3년, 길게는 개봉한지 20년이 가깝게 흐른 구작 영화들의 자료를 들춰보다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앞서 거쳐간 선배들이 이 영화를 사랑한 시간을 훔쳐 보는 것 같다. 치열함 속에 엿보이는 애정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사랑이라고 말 안해도 느낄 수 있어. 뭐 그런 느낌이다. 우리는 다음 영화를 향해 달려가지만, 마음들은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다. 지나간 영화가 그 자리에 있듯이.


이 공간을 통해 유물처럼 묻어두기 아까운 우리 영화의 기록들을 소개하거나, 사심 가득한 영화나 배우 추천사를 남기거나, 왠지 요즘 계절에 어울릴 것 같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러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데 마침 영화를 배급하는 회사에 다니고, 주절주절 쓰기를 좋아하는데 마침 홍보팀이라, 이런 나의 '덕질'은 회사의 허락을 얻은 업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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