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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는 것은 진실일까?

둘째 딸인 엄마가 둘째 딸을 낳아서 알게 된 것

by 심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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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예민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보통 내 부모님이나 형제인 경우가 많다. 예민하다는 말은 내가 느끼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거나 과한 반응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어서 나는 내게 그 말을 하면 약간의 경계심이 생긴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꼈을까 싶어서다. 섬세하다는 말을 두고도 예민하다는 말한다면, 상승보다는 하강을, 긍정보다는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는 내가 예민하다는 평가를 내린 상대에게 반대로 응수해 줄 준비가 있다. 나도 역시 가족들이 가진 취향이나, 사고방식,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나와 달라서 동의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가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이단아 같은 소외감을 느꼈다. 이런 이질감은 아주 미묘해서 콕 집어서 말한다면 구차한 것이 되지만, 나의 전공이 문학이라면 친언니는 컴퓨터 공학, 남동생은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제약회사 영업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 친언니와 남동생은 만나면 주식이나, 아파트 분양, 집값, 청약 소식을 나눈다. 서로 만난 적도 없는데, 동시에 같은 정보를 꿰고 있다. 그 사이에서 뜨개질하거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대기업 전화상담실에서 건강식품을 팔고 있는 엄마가 점심 식사 설거지를 윤이 나게 마치고 지나가면서 손목 아프니 적당히 하라고 한다. 무용하고 아름답고, 비경제적인 사고를 하는 나는 언제나 반쯤은 모자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거꾸로 나는 묻고 싶다. 모든 걸 돈을 잣대로만 재는 게 얼마나 촌스러운지 아냐고.


가족관계에서 우리는 종종 친밀하므로 잘 알수록 느껴지는 틈이 존재하는 것 같다. 내 아이를 살펴봐도 초등학교 4학년이 된 평화가 자기 요구가 많은 편이어서 예민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생각에 휩싸여 타인의 눈치를 잘 살피지 못하는 편이다. 반면 둘째 아이는 언제나 부모님에게 주문이 많은 오빠 등쌀에 자신이 말할 타이밍이 언제인지 늘 기다리는 편이다. 대화를 조용하게 들으며 눈을 굴리고, 맥락과 논리에 맞게 할 말을 갈고 닦아서 툭 던지듯 이야기한다.


“엄마 어제 지나고 어제는 엊그제야? 그제야?”

어디선가 읽었는데 헷갈린다고 했다. 사전을 찾아보며 엊그제와 그제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둘 다 이틀 뒤지만, 그제는 며칠 뒤를 표현할 때도 쓸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어려운 단어를 다시 물어보는 기민한 면이 생긴 것은 아닐까. 영화의 이런 모습에서 나는 오히려 더 예민함을 느낀다.


영화는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자기표현이 강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는 기질이 잘 티가 나지 않는 편이라 어릴 때는 아이의 성향을 잘 눈치채지 못했었다. 영화는 아이지만 알고보니 솔직하지 않은 편이었다. 늘 상대에게 좋은 감정만 표현하고, 그나마 편한 엄마나 아빠에게도 약간이라도 혼이 나면 칠색팔색했다. 혼이 나는 게 죽기보다 싫다는 듯이. 때때로 본인이 스스로 부정적인 감정을 참고 또 참지만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면 화가 나서 폭발하듯 눈물을 터트리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다음 날 영화가 물통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친구들이 교실에서 영화의 물통을 봤다고 해서 돌아갔지만 찾을 수 없자, 영화는 그야말로 기겁하면서 눈물을 터트렸다. 물통이 사라져 버린 상황이 참을 수 없어서 펑펑 꺼이꺼이 우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께 영화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물었다.


“물통을 새로 사면 돼지,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어?”

영화는 내 질문에 다시 울음이 터졌다. 그러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통 잃어버리면 엄마가 또 내 용돈에서 물통 사라고 할 거잖아. 물통은 만 오천 원 이상일 텐데 나는 절대로 그 물통을 내 용돈으로 사고 싶지 않다고오.”

영화는 그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다시 울기 시작했다. 물통을 기필코 찾아서 영화의 가방 안에 잘 들어가 있었다. 영화는 알까? 물건을 잃어버리면 자기 용돈에서 사기로 한 규칙은 2년 동안 팔만 원이나 되는 안경을 다섯 번이나 잃어버린 오빠 때문이었다는 걸. 영화는 학교에서 절대 물건을 잃어버릴 일이 없겠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남편에게 영화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했다. 남편은 천하 태평하게 학습만화를 넘기며 읽는 첫째를 보며, 누구 때문에 생긴 규칙인데 정작 당사자는 저렇게 태평하다고 비꼬았다. 첫째는 그러든가 말든가 아빠가 비꼬았는지도 모른다. 같은 자식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한 사람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다. 내가 느끼는 것은 진실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내가 살아온 습관과 경험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었다. 나의 예민함은 일종의 불가항력처럼 생겨 버린 기분이다. 아이를 관찰하며 나는 나의 어린 시절에 풀리지 못했던 실마리를 발견한다. 영화처럼 나도 둘째였고, 자기 요구가 많은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자랐다. 가족들과 식당에 갔을 때 내가 메뉴를 고른다거나, 여행지를 정하는 것처럼 큰 결정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나 무관심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장남과 장녀 사이 둘째였다. 내가 둘째여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둘째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질문 하나를 그렇게 해결할 수 있었다. 끝으로 고백하자면 내가 예민하다는 가족에게도 절반의 동의를 표한다. 이들에게만큼은 내가 가진 마음의 꼬투리를 꺼내 보인 적이 많았다. 예민하고 눈치를 보는 내가 유일하게 화를 내고 눈물을 터트릴 수 있는 최후의 가족들에게, 조금만 더 나를 참아보라고 권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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