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동양화물감 접시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동그란 원형 접시다. 그림을 그릴 때 물을 묻히면 색이 섞이는 모습이 마치 오색이 일렁이는 것 같다. 접시 위쪽은 수채화 물감이 올라가 동양화물감과 섞여 있다. 찻잔에 허브잎이 섞이는 모습을 들여다보듯 나는 이 접시로 색을 섞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즐기고 있다. 이 변덕스럽게 서로의 경계 없이 색을 침범하는 접시 딱 내 스타일 같다.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운 감정은 이 접시 안에서 물과 함께 풀어진다. 어떤 작가는 정밀한 과학자처럼 컬러차트를 만들어서 작업하는데 그런 태도를 꽤 동경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으로 색을 표현하는 것이 편하다. 게으른 것일까. 우선은 조금 더 고민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작업을 해봐야겠다.
수채화 물감 중 굳을까 봐 걱정되는 물감을 죄다 짜서 말렸더니 밀도가 낮은 물감이 바닥면에 펴지면서 모습이 흉해졌다. 다음에는 조금 더 오목하게 쌓아서 예쁘게 짜보고 싶다. 이토록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 이면지나 지저분한 종이도 완전히 썼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잘 버리지 못하는 편이었다. 한 번씩 마음을 먹고 한 박스씩 비워야 한다. 물건에 담긴 마음의 미련은 생활에 이렇게 영향을 미친다.
종이뿐 아니라 물감도 그렇게 아끼느라 그림을 다 그리고 남은 물감도 씻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수채화 수업을 듣는데 선생님이 깨끗하게 다음 수업을 위해 씻어달라고 했다. 파렛트를 씻다 보면 물감이 녹아 사라질 텐데도? 마음속으로 그런 질문이 생겼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단호해 보였다. 두말없이 시킨 대로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흘러내리며 붓으로 얼룩진 물감을 싹싹 씻었다. 다시 하얀 바닥면이 드러나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파렛트에 남은 물감은 맑은 색을 띠고 빛나고 있다.
마침내 새 얼굴이 된 것이다. 선생님을 만나서 그림을 배우면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은 장면은 단순한 원칙이었다. 파렛트를 깨끗이 할 것. 스케치를 성실하게 그릴 것. 좋은 그림과 구도를 참고하고 오래도록 구상할 것. 필요 없는 디테일은 생략하고 변형할 것. 알면서도 귀찮아서 지키지 못하던 원칙을,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자 수채화 선생님은 오롯이 수행하고 있었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순서에 맞춰 규칙을 지켜 작업하면 된다. 그동안은 단순히 한풀이의 수단으로 그동안 그림을 그려왔다. 동그라미 얼굴을 그리고, 눈과 코를 만들고 그 사람에게 내가 담긴 감정을 쏟아내기만 했다. 그렇게 채워진 그림은 구도가 엉망이었다. 스케치도 없이 그려진 감정 덩어리 그림은 누군가와 소통이 잘 안 되는 상태였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유일한 장점은 뭉개진 그림 인 채로도 계속 그림을 그려봤다는 점이다. 그렇게 쌓인 더미들은 뭉개진 얼굴을 한 채로 쌓여 있다.
완성은 했지만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하얀 접시 위의 물감에 물 묻힌 붓을 찍어 비빈다. 문질러서 원하는 색감이 나올 때까지 비벼준다. 한 가지 색만 더하면 다소 밋밋한 색이 나오는 저렴이 물감이라 주변에 있는 검은색이라 초록색을 찍어서 톤을 눌러준다. 종이 톡하고 선을 그어서 색을 확인한다. 마음에 들면 스케치북에 대고 그림을 그린다. 저기 거실에서 아이가 아이패드로 게임을 있다. 사랑하고 언제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아이를 그린다. 자주 바라보기에 언제든 그릴 수 있는 아이의 형태. 발동이 걸리면 한 장이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집중하여 휙휙 그린다. 잠시 그 속에 빨려 들어간다. 요즘은 단순히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잘 담아보고 싶다.
습관처럼,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으로 아이를 그려보았다. 다음에는 좀 더 내가 본 느낌을 온전한 색과 빛과 형태 그대로 재현해 봐야겠다. 내 마음대로 형태와 색을 바꾸는 것은 추상 핑계를 대면서 실력이 없는 것을 숨기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수채화가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수채화를 정석대로 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런지 종이에 물이 퍼지는 과정이나, 색이 섞이거나 돌아가는 변수들이 다 즐겁다. 좀 틀리면 어떤가, 다른 방식으로 나만의 체계를 이 과정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a3사이즈로 스케치 없이 완성한 평화. 형태가 마음에 안 든다 다음번에는 연필로 스케치를 해서 형태를 안정적으로 세운 후에 색을 더해야겠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은 초록색 평화 모습. 행복하다. 올해는 이렇게 나 자신이 그저 계속해도 즐거운 작업을 좀 더 이어 나가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