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제목부터 마음에 들어 이 책을 골랐다. 물멍을 좋아하는 나는 물 속에 사는 것들을 좋아한다. 나의 애완 물고기들을 떠올리며 아무 정보 없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은 소설, 에세이, 일기, 등등.. 무엇이라고 딱 정의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소설처럼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책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을 소개하고 그에 따라 달라지는 작가의 견해를 서술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분류학자로, 어류를 분류하는 과학자였다. 그는 지구 상의 새로운 종들을 밝혀내고 그들을 분류하고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혀내어 자연에 숨겨진 청사진을 찾아내길 바랐다.
그는 수십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며,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을 그와 그의 동료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끔찍한 지진으로 수많은 어류 표본들을 잃고, 그의 소중한 사람들을 잃기까지 하는 역경들이 있었지만 그는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그를 무너지지 않게 했던 힘, 그것이 그를 더욱 성공하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그의 명성과 업적을 망친 것은 또한 그 힘이라고 느껴졌다.
아마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윈이 말하는 “일반적으로 과학은 믿음을 싫어한다”라는 경고를 알고, 그의 믿음을 반증하는 많은 증거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진실보다 그 믿음이 주는 질서가 그의 삶의 의미였기에, 그는 결코 자신의 믿음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믿음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의 질서는,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을까..
대학교 시절, 생물 수업을 듣다가 문득 큰 깨달음을 느꼈던 하루가 있었다.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해왔던 여러 생명 현상을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기 위해서, 자연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여 설명하는 것이 이 생물학 책이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단순한 원리인데 왜 이제껏 깨닫지 못했나를 생각해보면 그저 인간의 관점, 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은 어떤 생물이 더 똑똑하고 그렇지 않은지, 어떤 동물이 나쁜 동물이고 좋은 동물인지 얘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구분짓고 정의를 내리는 주체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 그대로 진리인 듯 자연스레 받아들여버리게 된다.
책에서는 민들레에 대한 얘기를 한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와 벌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또 인간의 분류에 대한 얘기도 한다. 구분짓는다는 것, 단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의 정신이 세상을 조각해내는 일을 늘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만물에 붙인 이름들은 잘못된 것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노예”는 인간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자유를 누릴 가치도 없는 존재였던가? “마녀”는 화형을 당하는 게 마땅한 존재들이었나? 겸손을 유지하라는 것, 우리가 믿는 것들, 우리 삶 속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늘 신중해야 한다는 걸 되새겨보게 해주는 사례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룰루 밀러는 이렇게 강조한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는 겸손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또한 나 자신의 오류, 또 다른 사람들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 한 걸음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느낀다. 어떠한 하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사람을, 현상을 정의 내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오류와 모순들이 존재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면, 그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나의 오류를 인정하고 있을까.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나도 데이비드처럼 나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한 때가 있었다. 삶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은 남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의 원인이 타인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의 주도권을 그 타인에게 양도한 것이었다. 주도권을 넘긴 이상 내게는 받아들여야 하는 괴로움만이 남았고,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처럼 보였다.
그때 내 생각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나 자신의 오류와 문제를 인정하는 순간에서야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수많은 변화와 혼돈의 세상 속에서, 변화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벽을 쉽게 무너트릴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기만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지, 아니면 오류투성이 인간을 받아들이고 변화해 나갈지는 이제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