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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새해 Aug 13. 2020

나는 내게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심보선 /편지


나는 어쩌면 이렇게 내게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할까? 넘어서는 안될 금이라도 있는 것처럼  늘 제자리에서 맴돈다. 뻔히 알면서 똑같은 오류를 반복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모른 체해도 될 일을  떠맡아  뚜벅뚜벅 간다. 이 무슨 불타는 사명감인가 바로 피곤이 몰려온다. 아, 또 쓸데없는 짓을  시작했구나! 알지만 번번이 그렇게 되고 마는 것들이 있다.  한편으론  그런 내가 못마땅하고  한편으론 과연 나 답다! 씨익  웃음도 나는 날, 중력에 이끌리듯 시집 한 권 펼쳐 읽는다.


편지 /심보선

이곳은  오늘도 변함이 없어
태양이 치부처럼 벌겋게 뜨고 집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넋 놓고 살고 있습니다
탕진한 청춘의 기억이
간혹 머릿속에서 텅텅 울기도 합니다만
나는 씨익,
웃을 운명을 타고났기에 씨익,
한번 웃으면
사나운 과거도 양처럼 순해지곤 합니다

요새는 많은 말들이 떠오릅니다, 어젯밤엔
연속되는 실수는 치명적인 과오를
여러 번으로 나눠서 저지르는 것일 뿐,
이라고 일기장에 적었습니다
적고 나서 씨익,
웃었습니다
언어의 형식은 평화로워
그 어떤 끔찍한 고백도 행복한 꿈을 빚어냅니다
어젯밤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행복한 꿈이었다 굳게 믿습니다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지만
이제 삶의 고통 또한 장르 화하여
그 기승전결이 참으로 명백합니다
다만 어두움을 즐겨하기에
눈에 거슬리는 빛들에겐
좀 어두워질래? 타이르며
눈꺼풀을 닫고 하루하루 지낸답니다

지금 이 순간 창밖에서
행복은 철 지난 플래카드처럼
사소하게 나부끼고 있습니다
그 아래 길들이 길의 본질을 망각하고
저렇게 복잡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들의 페이지들이 구겨지면서
아이고야, 아픈 소리를 냅니다

(전문)


슬픔이 없는 십오 초, 2008 /문학과 지성사


십여 년 전  '슬픔이 없는 십오 초'라는 시집 제목을 처음 봤을 때 하! 십오 초 빼고 다 슬프다는 가? 잔뜩 슬픔을 각오했지만  슬프기보다는  허무하고 허무하기엔  통찰과 쿨내가 진동하는 시집이었다. 시집을 채우고 있는  빽빽한 좋은 시 중  오늘은  '편지'라는 시가 유난히 읽힌다.  복잡다단한 생각이 오고 간 하루, 길게 생각 말고 씨익 한번 웃고 말자는 인가.


 시인이  사회학자인 심보선은  사회문제에 적극 발언하고  예술 현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시도하는 문화 활동가이기도 하다. 시를 쓰는 게 쑥스럽다면서도 누구보다 활발히  적인 것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고 , 고 현장에  직접 써 붙였던  '갈색 가방이 있던 역'이라는 시를 잘 기억하고 있다.  시 쓰기에 대한 이런 고백도 인상적이었다. 

회의 시간에 짬짬이 남몰래 시 한 편을 써 내려갈 때 나는 투사나 영웅이 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살고 싶었다.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 심보선/ 그을린 예술/민음사/ 프롤로그)


매일이 견딜 수 없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시를 쓰는 사람도 시를 읽는 사람도 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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