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바꾸는 나의 여러 얼굴들
외국어를 배우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단어와 문장을 익히는 것을 넘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조금씩 달라진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어휘력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말투가 바뀌고, 말하는 방식이 달라지며, 어느새 사고방식과 감정 표현까지 미묘하게 달라지는 걸 느낀다. 외국어는 단지 새로운 언어 체계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나의 정체성과 감정, 사고의 틀까지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경험이다. 이런 변화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을 넘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프레임이 된다. 예를 들어 영어는 구조상 명확한 주어와 동사, 그리고 단도직입적이고 자기주장을 분명히 하는 표현이 특징이다. 이런 언어를 자주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표현도 직설적이고 자기주장을 분명히 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말투가 달라지고, 말의 구조가 사고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반면 중국어나 일본어는 문맥과 뉘앙스, 암묵적인 의미를 중시한다. 말을 하기 전에 맥락을 먼저 읽고, 직접 말하기보다는 돌려 말하는 기술이 중요해진다. 이런 언어를 사용할 때는 나도 모르게 말수가 줄고, 좀 더 조심스럽고 배려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에 따라 세상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언어를 배우면 자연스럽게 그 언어가 뿌리내리고 있는 문화를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일본어를 공부하다 보면, 예절과 겸손의 문화가 언어 곳곳에 스며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존댓말의 층위, 상대방을 배려하는 표현,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분위기를 살피는 태도처럼, 이런 언어를 접하다 보면 문장을 배우는 것을 넘어 사람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일본어나 한국어처럼 많은 정보가 문맥과 비언어적 신호에 담겨 있는 문화에서는 정중함과 간접적인 표현이 강조된다. 반면 영어처럼 명료한 전달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보다 직접적이고 간결한 표현이 흔하다. 결국 언어는 문화의 축소판이며, 그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해당 문화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언어를 바꿀 때 사고방식과 감정, 행동이 함께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영어를 사용할 때는 표현이 간결해지고 유머도 직설적이 된다. 중국어를 사용할 때는 말의 속도가 빨라지고 확신에 찬 어조가 나온다. 일본어를 쓸 때는 공손하고 정중한 화법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언어마다 나의 말투, 감정, 심지어 생각의 방식까지 달라진다.
이처럼 각 언어는 그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적 질서와 문화적 감수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때, 자신 안에 있는 다양한 자아를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여러 언어는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면모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어는 때때로 감정을 더 자유롭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언어가 감정과 가지는 거리감 때문일 수 있다. 모국어는 내 감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더 조심스럽게 다뤄지지만, 외국어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제공해 감정을 객관화하거나 더 쉽게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어 "I was really upset"이나 "I need some space" 같은 표현은 영어로는 비교적 담담하게 꺼낼 수 있지만, 한국어로 말하려고 하면 훨씬 조심스럽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감정이 격해질 수 있는 순간에도 외국어는 감정에 약간의 거리를 두게 해 주어, 솔직하면서도 덜 감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처럼 외국어는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보다는, 그것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고 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완충 장치로 작용하기도 한다.
외국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말과 표현을 더 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지?'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자기 자신의 언어 사용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이는 자기 인식과 성찰을 유도하고, 생각을 더 넓고 유연하게 만든다.
실제로 여러 언어를 전환하며 사용하는 과정에서 인지적 유연성이 길러지고, 이는 일상생활의 문제 해결 능력이나 창의적 사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단지 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고와 감정, 그리고 정체성까지 형성하는 자극이 된다.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단순히 낯선 문법과 어휘를 익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언어에 담긴 문화와 감정, 사회적 역할, 사고방식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결국에는 나 자신을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여정이다. 그렇게 언어를 하나씩 익혀 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그만큼 더 입체적인 존재로 성장해 간다.
다양한 언어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더 다면적이고 유연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만큼 더 다양한 나를 만나게 된다. 하나의 언어는 하나의 세계이며, 외국어는 세상을 향한 창이자,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언어 하나가 열어주는 또 하나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점차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외국어를 배우는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러한 변화와 확정의 여정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