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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화 May 28. 2019

으이구 바보야. 그게 뭐가 무서워.

나와 조카의 고소공포증.

 나는 고소공포를 가지고 있다.

왠지 의학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 민망스러워 단어의 끝에 “증”을 붙이고 싶진 않지만 높은 곳에 가면 너무나 무서워하기 때문에 나의 그것을 고소공포증이라고 불러도 틀림이 없긴 하다.

 나의 고소공포증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 그 공포증이 유전자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나의 DNA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을 거라고 생각될 만큼 평생을 함께했다.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놀이공원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놀이기구.

어렸을 적 부모님이 큰 맘먹고 데려가 준 롯데월드에서 내가 탈 수 있다고 느낀 건 회전목마뿐이었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바이킹과 직각으로 내리 꽂히는 롤러코스터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오금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놀이기구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굳이 저 기구를 타보지 않아도 얼마나 무서운지를 나에게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 비명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재미있는 기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런 건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고소공포증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욱 불편해졌다. 몸과 마음은 무럭무럭 자랐지만 이 놈의 고소공포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유년기의 그 공포가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지금까지 어찌나 꿋꿋하게 내 안에서 잘 살고 있는지.

최대한 놀이공원을 피하면서 살아온 나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었고 그렇게 방문한 놀이공원에서 친구에게든 연인에게든 예외 없이 들었던 말이 “저게 뭐가 무서워” “겁이 왜 이렇게 많아 덩치는 산만해서” “어이구 바보” 등이었다. 물론 웃으며 건네는 그들의 말 어디에도 악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함께 즐기지 못한다는 미안함과 겁이 많다는 부끄러움은 언제나 나를 스쳐갔다.

어쩌면 내가 놀이공원 가기를 싫어하는 건 놀이기구가 아니라 일행들의 그 말들이 무서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말들이 켜켜이 쌓여 아물지 않은 마음속 상처로 남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나에게도 조카들이 생겼다. 두 명의 조카는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롯데월드에 갔던 그때의 내 나이가 되었고 명절 때가 되면 전을 부치는 식구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녀석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야 했다. 첫째 여자아이는 나와 달리 겁이 없었지만 둘째 남자아이는 나와 같은 “겁쟁이”다. 첫째는 거의 모든 놀이기구를 타고 싶어 했고 둘째는 거의 모든 놀이기구를 타고 싶지 않아 했다. 나는 그 중간쯤이었고. 그래도 갈 때마다 적당한 기구를 골라 하나씩은 셋이 함께 타고 온다. 언젠가 한번 첫째가 무척이나 타고 싶어 했고 나도 저 정도면 탈 수 있겠다 싶었지만 둘째가 무서워했던 기구 앞에 섰던 적이 있다. 나는 두 조카 모두 행복했으면 했다. 그래서 둘째에게 물었다


“이거 무서워서 못 탈 것 같지? 그럼 삼촌이 콜팝 사다 줄 테니까 누나랑 삼촌이 이거 탈 동안 여기서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릴래?”

“응!! 근데 삼촌 나 겁 많아서 바보 같지?”


순간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한다.

누가 이 아이에게 바보 같다고 한 걸까. 겁이 많은걸 바보라고 표현한 그는 누구일까.


“아니!! 그게 왜 바보 같아!! 사람마다 다른 거야. 무서울 수 있어. 삼촌은 지금도 무서운데? 그런 생각하지 마. 무서워도 되고 무서우면 안 타고 콜팝 먹으면 돼!”


 나는 둘째 녀석이 나처럼 놀이공원에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놀이기구를 꼭 타지 않아도 놀이공원은 즐거운 곳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건 그 무언가 때문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자신 때문일 수 있으니.


 어쩌면 우리는 무심코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감정을, 취향을, 기호를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하거나 폄하했던 건 아닌지.

그런 마음을 속으로 먹는 것을 뭐라 할 수 없지만 그 마음을 누군가에게 표출한다는 건 분명 언어로 하는 폭력임이 분명하다.

 토론과 조율은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인데 상대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과정이 된다. 나와 다르지만 누군가는 나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인정. 특히나 그 다름이 감정이나 취향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에서부터 합의가 시작될 것이다.


 “나와는 다르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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