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계획이 아닌 손녀의 계획(?)에 따라 움직여줘야
직장선배이자 인생선배인 k전무는 삼식이가 되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카페지정석에 앉아 공부하는 카공족이다. 카페로 찾아오는 친구들 만나 점심식사하고 헬스클럽에서 체력단련을 한다. k전무는 치매예방을 위해 공부한다지만 적지 않은 연배에 연달아 기사자격을 취득하는 것을 보면 치매는커녕 회춘의 조짐을 보이는 듯하다.
k전무가 공부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퇴직하며 재미없는 일은 하지 않기로 작정했기에 책 읽기, 끄적거리기, 낚시, 커피로스팅을 하고 있다. 열정이 식은 탓도 있겠지만 목적 없는 전공 공부는 여전히 재미없는 것 중 하나이며 죽기 전까지 재미있어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k전무는 3년 앞선 시대를 살았으니 상황에 맞게 선행 경험을 이야기해 준다. 특히 촌철살인 같은 비유나 은유를 잘하는데 그것이 충청도에서만 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귀에는 쏙쏙 들어온다.
약주 한잔 하면 손녀가 보고 싶어 손녀집주위를 서성인다는 손녀바보 내지는 손녀등신인 k전무는 손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자신이 있다는데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친자식이 아닌 손주를 위해 과연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요즘 손녀 보느라 주 5일 근무해 시간 내서 시내 나가기 어렵다는 말에 시간 편할 때 나오라며 이야기를 덧 붙인다. “애 볼래, 땅 팔래? 하면 땅 판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손주들과 교감하는 시간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지요. 수고하시고 편할 때 연락 주세요.”
“애 볼래, 땅 팔래?”하고 물으면 모든 사람들이 땅을 판다고 할 만큼 애 보기가 어렵다는 말을 유머스럽게 표현한 것이지만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다. 젊은 친구들은 이런 상황을 뼈 때린다고 표현하던가?. “애 볼래, 땅 팔래?”라는 표현이 역사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기에 k전무가 오리지네이터는 아닌 것 같아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검색되지 않는다.
사실 아이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돌발변수가 많은 일이니 신경 쓰이고 한눈팔지 못하는 일이다. 땅 파는 일이야 계획된 물량을 자의적 판단에 따라 시간과 체력을 안배하여 재량껏 파면된다. 변수라고 해봐야 땅이 굳고 무르고 돌이 나오는 정도다
손녀 돌보는 것도 단편적으로 보면 매우 간단한 일이다. 아침 먹이고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면 오전 일이 끝나며 어린이집 하원시켜 저녁 먹기 전까지 같이 놀아주면 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손이 많이 가고 내 계획이 아닌 손녀의 계획(?)에 따라 움직여줘야 하니 모든 것이 변수이며 내 의지는 없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끌려가는 일들은 힘들기 마련이다.
손녀가 먹는 배달반찬이 있으나 입맛이 수시로 변하기에 1~2개 정도 반찬을 만들어야 한다. 어른용과 아이용으로 만들어야 하니 번거롭기는 하지만 이제는 숙달이 되어 식은 죽 먹기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며 밥을 먹여야 잘 먹는다. 아내가 아침을 먹일 동안 나는 과일을 준비한다.
여자아이라 옷을 가려 입는다. 여성스러운 옷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공룡을 좋아하기에 속옷부터 신발까지 모두 공룡이다. 마음에 드는 공룡이 매일 바뀌는 것이 변수다. 어제 입었기에 세탁기 안에 들어가 있는 공룡옷을 찾게 되면 아내와 손녀는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옷 선택이 끝나면 로션과 선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묶어줘야 하고 모기알레르기가 있어 모기기피제를 뿌려줘야 한다. 신발을 골라야 하는데 야외학습이 있는 날에는 운동화를 신겨야 하니 샌들과 장화는 미리 치워 놓아야 한다. 샌들을 신겠다고 우기는 날에는 현관문을 나서기 힘들다.
손녀집에서 어린이집을 가려면 한 층만 내려가면 된다. 계단을 통해 걸어내려 가도 되지만 엘리베이터 또는 계단에 대한 선택과 결정권한은 손녀에게 있다. 아파트를 나서면 어린이집까지 100미터다. 조부모가 손녀의 양손을 잡고 날아갈 것인지, 아니면 화단의 꽃과 개미를 관찰하며 갈지는 유명한 점쟁이도 맞추기 어렵다.
어린이집까지 양손을 잡고 날아가든 개미와 놀면서 가든 오전일과의 마지막관문이 남아있다. 어린이집 정문에서 기분 좋게 헤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번갈아 안아달라는 날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는 이야기다.
손녀를 데리고 나와 놀이터에서 놀다가 어린이집에 가기도 했지만, 울다가도 친구들 만나면 바로 울음을 그친다고 한다. 우는 아이를 떼어 놓고 뒤돌아서는 악역을 자처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마음이 아프다.
“애 볼래, 땅 팔래?”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선택권도 없지만 손녀와의 오후 일과가 시작되었다. 이린이 집에서 특이사항이 있는지 전달받으면 놀이터로 간다. 혹서기 혹한기는 실내체육관에 가고 날 좋으면 실외 놀이터로 간다. 저녁 5시가 되면 주방을 담당하는 나는 저녁식사 준비하러 집에 와야 한다.
저녁식사 준비하면 큰 아이가 퇴근하지만 아직 인수인계할 시간이 아니다. 손녀는 엄마에게 안기지 않고 할머니와 같이 놀고 할머니가 책 읽어주며 밥 먹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를 목욕시키는 것부터는 엄마와 함께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퇴근하고 문을 닫으면 하루치 땅파기보다 힘들다는 육아가 무사히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