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장애물을 다 뛰어넘을 필요는 없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마음
병원에서 검사를 마친 어머니를 태우고 이동하는 길이었다. 검사결과가 나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언즈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큰일이야 있겠니. 아무튼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구나...”
어머니의 입술을 가까스로 비집고 나온 “미안하구나.”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에 어쩌면 이런 당부가 담겨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래저래 살아가면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 같다. 내가 들려주는 말에, 네 걱정을 잠시 접어서 기대어 놓으렴. 너무 염려하지 말고”
완벽함보다는 편안함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팔찌를 만들기 위해 끈으로 구슬을 꿸 때, 일부러 다른 모양의 구슬과 흠이 있는 구슬을 중간중간에 끼워 넣는다고 한다. 구슬이 모두 똑같으면 모양새는 완벽할지 몰라도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때때로 타인의 편안함에 매료된다. 대부분 사람은 완벽한 타인보다 약간 빈틈이 있고 종종 실수도 저지르는 타인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모든 장애물을 다 뛰어넘을 필요는 없다
지친 마음을 끌어안고 밤을 보내고 나면, 매일 아침 우리 앞에 새로운 장애물이 세워진다. 우린 그걸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발을 굴러 허공을 뛰어오른다. 몸을 솟구쳐 크고 작은 장애물을 뛰어넘는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날마다 놓이는 모든 장애물을 ‘다’ 뛰어넘으며 살 필요까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은 다 특별하지만 특출 난 사람은 드물다
어떤 면에서 인생은 내가 그리 특출 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틈틈이 깨닫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실패를 겪을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이를 부인하기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지도 모른다. 우린 실패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울 때가 많다.
하수와 중수와 상수의 기준
목동역과 등촌역 중간에 위치한 ‘구도 커피’라는 곳을 방문했다. 메뉴판 상단에 “가장 이상적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정한 규율을 지켜 나갑니다!”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원두에 대한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사장으로 보이는 사내를 힐끔 곁눈질했다. 내가 커피를 주문하는 순간, 노트북에 열중하던 그가 빠르게 주방으로 이동해 커피추출기구를 집어 들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될 때마다 굵직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하수와 중수와 상수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단순히 기술이나 내공의 차이일까? 어쩌면 흔히 이야기하는 ‘뻔함’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떤 방식으로 행하느냐에 따라 하수, 중수, 상수가 나뉠 거란 생각도 든다.
하수는 기본에 해당하는 당연한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건 누구나 아는 뻔한 거잖아!” 투덜대며 근본과 기초가 되는 일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 때문에 기본기를 닦는 수련의 과정을 훌쩍 건너뛰기 바쁘다. 당연히 자기 안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고 주변 형세를 살피지도 모른다.
중수는 뻔한 것이 중요하다는 이치를 가까스로 이해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사람이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자신의 수준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본다. 중수는 현재에 만족하며 적당히 머물지,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릴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나 싶다.
상수는 뻔한 걸 자기 것으로 만든 후, 그걸 날개 삼아 자신만 아는 아득한 세계에서 훨훨 날아다니며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다. 기예를 갈고닦는 차원에서 벗어나 어떤 현상과 실재 너머에 있는 본질을 발견해 낸 사람이다. 남이 일으킨 물결이 아니라 스스로 일으킨 물결에 올라타야 멀리 갈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은 자다. 상수는 다른 상수나 중수, 하수와 경쟁하지 않는다. 스스로 꿈을 이뤘기에, 남이 볼 수 없는 세계를 이미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누구나 아는 일을 가장 자연스럽게 행하는 자다.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때때로 시시포스처럼 벗을 길 없는 원죄에 묶여 있는 심정으로 삶의 고난과 마주한다. 정말 견디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끝을 짐작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괴로움과 어려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놓아 운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때론 관계가 아니라 나를 지켜야 한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사람을 대할 땐 불을 대하듯 해야 한다.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접근하고, 멀어질 땐 얼지 않을 만큼만 떨어져라”라고 말하면서 인간관계야말로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대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고민을 안고 산다. 오래전 맺은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다가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새로운 인연을 맺는 과정에서 얻은 상처가 쌓여 곪아터지는 경우도 있다.
내 존엄성을 짓밟혀가면서까지 마땅히 유지해야 하는 인연은 없는지도 모른다. 나를 빼앗기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관계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인연을 맺고 푸는 일
삶은 타인과 인연을 맺고 푸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야기의 총합이다. 인연이 이어지고 끊어질 때마다 기억 속에 숱한 사연이 쌓인다.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나와 좋아하는 게 비슷한 사람과는 빨리 친해질 수 있지만 정작 오랜 기간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싫어하는 게 비슷한 사람임을. 또한, 친한 사이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불편하지 않은 관계가 아니라 때론 이야기를 전혀 나누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관계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