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0년 조선, 첫 국민투표 하던 날
'역사저널 그날'은 KBS에서 2013년 10월 26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일요일 늦은 밤 나주로 가는 회사 셔틀버스에서 보는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 버스에서 내려야 하기에 제대로 시청한 적이 거의 없었다. 책은 방송된 내용을 발간한 것으로 조선 편은 총 8권이다. 프로그램이 종방 되기 전 후속 편이 간행될 수도 있다. 1권에서 흥미로운 제목의 이야기 한편을 정리해 봤다.
1430년 조선, 첫 국민투표 하던 날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세금은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만큼 엄격하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은 국가 경제의 근간이기 때문에 조세제도의 공정성과 효율성은 나라발전을 좌우한다. 사회 발전에 따라 현대에는 수많은 명목의 세금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단순했던 전근대에는 사람에게 부과하는 人頭稅(인두세)와 토지에 부과하는 田稅(전세)가 대표적 세금이었다. 존재가 유동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징수하기 어려운 人頭稅보다 항구적 대상인 토지를 대상으로 삼은 田稅가 더 중요했다.
세종이전의 田稅는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고 수확량이 적고 많음을 관원이 조사해 세액을 정하는 방법으로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컸다. 또한 토지면적을 측정하는 자(尺)도 달랐다.
세종과 신하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새로운 농법도입으로 농업생산량이 크게 늘어난 것도 중요한 동기였다. 농업생산량을 정확히 세액에 반영하여 객관적 기준에 따라 과세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貢法(공법)이었다. 공법의 핵심목표는 모든 납세자에게 1 결당 10두의 전세를 고르게 걷는 것이었다.
토지를 6등급으로 세분화하고 토지면적을 측정하는 자(尺)도 周尺(주척)이라는 표준 자를 썼다. 해마다 수확량에 따라 20두에서 4두까지 차등 부과했다.
아무리 좋은 취지라고 해도 모든 변화는 일단 불편하다. 제도의 규모와 중요성이 클수록 변화내용과 불편정도가 커지게 마련이다. 국가경제의 줄기라는 측면에서 貢法의 도입은 지난한 문제였다.
이런 사정은 근대사에 독특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대규모 의견조사가 실시된 것이다. 1430년 조정은 5개월 동안 전국 17만여 명에게 찬반의견을 물었다. 그때의 교통과 통신 같은 기술력과 행정력을 생각하면 인구의 4분의 1을 대상으로 행한 지난한 조사였다. 결과는 찬성 9만 8천 명, 반대 7만 4천 명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크게 찬성했으며 함길도와 평안도는 반대가 우세했다.
찬성이 많았지만 세종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은 지루할 정도로 장단점을 논의 후 1441년 찬성이 우세했던 전라도와 경상도부터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3년 뒤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의견조사부터 전국실시까지 15년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다.
貢法으로 국가경제가 튼튼해졌다고 평가된다. 앞서 말한 대로 농업기술의 진보로 농업생산도 크게 늘었다. 문화가 발전하려면 경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세종 때의 눈부신 문화적 성취는 농업발전과 공법 도입이 가져온 경제적 성장에서 힘찬 동력을 얻었을 것이다.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각 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해 오거든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을
백관으로 하여금 숙의토록 하라.
- 세종실록 12년 7월 5일 -
*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노비, 여자, 어린이를 제외한 모든 백성이 참여한 전국 여론조사에는 인구의 4분의 1인 17만여 명이 참여했다. 양인이상이면 누구나 1표씩 행사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국민투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