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주의자의 낙관
진흙 속에서 피어난 장미~라는 노래가 요즘 맴돈다. 나는 딱히 장미는 아니지만, 진흙 속에서 빠져 죽지 않은 인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진흙의 세계가 가고 사막의 세계가 왔다. 진흙의 세계에서는 나는 끊임없이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지난 5개월 동안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모든 일이 일어났다. 3명이서 시작했던 프로그램을 혼자 감당해내야 했고, 1년 치 예산을 따오는 중요한 사업도 해내야 했다. 너끈히 해내고 싶었지만, "내가 이걸 어떻게 해"라는 마음이 들어 자꾸만 벅차고 짜증이 났다. 하면서도 이런 내가 싫었다. 그럼에도 마감에 치여, 막중한 책임감에 치여, 꾸역꾸역 걸어 나갔다. 걸어 나가면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피하고 있은 모든 일들이 일어났지만 아직 살아있다. 진흙은 나를 질식시킬 수 없었다.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잘못되면 고치면 된다는 것. 일단 길을 걸어가 봐야 그 길이 맞는지 틀린 지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잘못을 바로잡을 겸손한 태도만 있으면 된다. 할 수 없을 것 같은, 악몽 같은 모든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 모든 일들이 지나갔다. 어쩌면 지나갔다 대신해냈다를 붙여도 될 것 같다. 방송도 네 번이나 더 했고, 상도 받았다. 예산도 따왔다. 내 앞에서 고맙다고 우는 인터뷰이들을 만났고, 어쩌면 평생 해내고 싶은 일도 만났다. 지금 나에게 있는 여유는, 내가 피하고 싶었던 모든 최악들을 피하지 못하고 겪어낸 데에서 나온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을 겪고도 나는 멀쩡하게 살아있다. 어라라. 최악들이 모여도 별일 없더라! 다 괜찮더라! 한 번 이런 경험을 하니, 배짱이 좀 생겼다. 내 경험과 여유는 나의 전리품이다. "나 걸을 수 있을까? 걷다가 넘어지면 어떡하지? 나 뛰어도 될까?" 하다가 막 내달려본 자의 여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경험을 통해 나의 자아는 성장했다. 뛰어도 되고, 넘어져도 된다. 다 괜찮다!
이제는 내 일이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을 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았다. 동시에 이곳에서의 만 2년이 지나간다. 하나의 터닝포인트를 지나는 기분이다. 작은 박수를 스스로에게 쳐준다. PD라는 일은 나에겐 적성과 역량이 맞는 일이라고 아직은 생각한다. 영상을 편집하는 것 자체가 재밌기 때문이다. 또 다른 힘듦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도 두렵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배짱이 조금 늘었다. 최악이 닥쳐도 결국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좋은 태도를 갖추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시사 프로그램을 하면서 비대해졌던 자아가 지금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다시 겸허해지는 느낌이다. 수능 30번 문제 맞히기에 연연하다 놓치고 있던 익힘책을 푸는 기분이랄까. 하마터면 자아도취형 인간이 될 뻔했던 것 같다.
정치인을 때려잡는 것보다, 어르신들이 찍어온 영상을 편집해서 방송에 내보내는 게 어쩌면 세상에 더 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어르신들이 찍어온 영상을 편집하는 일은 죽도록 지루하지만 말이다. 어르신들의 자아실현에 기여하고 있는 느낌이지만 동시에 내 자아는 깎여나가고 있다. 진흙을 벗어났더니 사막이 나타났다. 사막을 고요하게 걸어가면서 나를 재건하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무엇을 만들고 싶은 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궁금하다. 부지런히 보고 축적해서 다음 꿈을 향해 나가고 싶다. 아마도 다음 꿈은 녹여먹는 꿈이 될 것 같다.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 새로운 피티샵에 가서 첫 피티를 받았다. 전에 배웠던 선생님보다 훨씬 세세하게 알려줘서 운동이 다시 재밌어졌다. 전 선생님에게 계속 배웠다면 아마 무릎도 계속 아팠을 거고,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을 것 같다. 결국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자극을 받으면서 성장한다. 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새로운 프로그램은 아직 조금 더 적응해 봐야겠지만, 이제 새로운 챕터가 열린 것은 확실하다. 새로운 헬스장, 새로운 집, 새로운 프로그램, 새로운 사람들. 내가 늘 만나던 사람들을 벗어나니 다음이 조금은 기대된다. 나는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 나에게 5월은 초여름이 아니라 진흙을 벗어나 사막으로 온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