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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큐마 Jul 09. 2023

무해한 연애

최근 선배가 나에게 너는 왜 연애를 하지 않느냐며, 20대의 연애에 대해 물었다. 피할 수가 없는 자리였다. “너는 어떤 사람이어야 연애하는 건데?” 대답을 기다리며 선배는 내 잔에 위스키를 한가득 채워줬다. 위스키를 쭉 들이키는 몇 초 간 생각해 보고 답을 했다. “전 무해한 사람이요. 결정적으로 유해한 사람은 못 사귀겠어요.” 내가 나로 사는 데 무해한 사람이 좋다. 내 여성성과 소수자성을 비난하거나, 여성이니까 당연히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조금 어렵다. ‘어느 정도의 감수성을 가진 사람인가’ 내가 가진 최소한의 레이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자극하지 않는 무해한 콘텐츠를 찾아 헤맨다. 나에게 그런 콘텐츠는 미드다.


영어는 이상하게 나를 안정시키고 기분 좋게 한다. 프렌즈나 웬 아이 밋 유얼 마더 도 재밌게 봤고, <언 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나 <원데이 앳 어 타임> 같은 시트콤류의 미드들도 재밌다. 나의 올타임 페이보릿은 추리극들이다. 나는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추리극을 섭렵했다. <홈랜드> <지정생존자> <블랙리스트> <NCIS 시리즈> <FBI> 등등. 추리극에서 조금 틀면 매디컬이다. 한 때 <하우스>도 재밌게 봤다. 이 안의 여자 주인공들은 매우 플랫 하게 그려지지만, 모두 옛날이라는 변명이 존재한다. 아직 선진화되기 전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괜히 외국의 이야기니까, 하하 깔깔 웃을 수 있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준다.


가끔 마음이 좋지 않을 때면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다. 그 시즌이 끝날 때까지 설거지를 할 때든 청소를 할 때든 계속 틀어두고 그 드라마에 마음을 붙인다. 혼자 여행을 갔을 때도, 혼자 부산으로 이사를 왔을 때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가 있는 한 나는 썩 외롭지 않았다. 키면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좋았으니까 말이다. 특히나 나는 옴니버스 식의 드라마들을 좋아하는데, 다음화를 보지 않아도, 그 전화를 보지 않았어도 깔끔하게 한 편이 마무리되는 것이 마음에 든다. FBI류나 NCSI류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사건이 미결되는 일이 없다. 늘 예정된 듯 모든 일은 해결된다.


미드를 보다 보면 주인공들의 솔직함에 많이 감화된다. 자기가 느끼는 사랑, 분노, 불만 등을 주인공들은 과하도록 그대로 말한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 궁금하다. NCIS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형사 거나 경찰이다. 그런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의 직업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전력을 다하고, 실패해도 이내 발전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단단해지는 기분이다. 어차피 잘될 거니까, 어차피 성장할 거니까. 그들이 좋다. 그런 직업의식, 그리고 기어코 해내는 캐릭터들을 보면서 나는 방구석에 누워서 박수를 친다. 쉴 때도 살짝 긴장하면서 추리극을 보는 내 변태성을 나는 썩 잘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내가 그런 늙은 미드를 좋아한다는 것이 스스로에게는 위로가 되는 취미이나, 피디로서 썩 자랑스럽지는 않다.


주말이 끝나고 “너 이거 봤어?” (예를 들면 사이렌 봤어? 최강 야구 봤어? 피지컬 100 봤어? 등등)라는 질문에 “어… 저는 주말에 <하우스> 봤어요 ㅎ”라고 말하면, 굉장히 야망 없는 MZ 같아 보인다는 것을 안다. 디톡스용으로 옛날 미드를 보지만 또 그걸 보기 때문에 힙함을 상실한 피디가 되고 만다. 하루가 끝나고 ch.now를 켜 미드를 뚝딱 보고 자는 삶이 아직은 내게 위안이 된다. 나의 작은 안식처가 조금 부끄럽지만, 놓아줄 수가 없다. 늙은 미드로 디톡스를 빠르게 해치우고, 힙한 콘텐츠를 의무적으로 보는 나는 이상한 MZ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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