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
"가시나가 어딜 남자를 타 넘고 다니노."
20년이 지나도 생생히 기억한다. 시집살이를 오래 했던 할머니는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아들이 고팠다. 십 대인 손녀에게 밥 차리라고 하더라도 40대 아빠에겐 주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겨울을 지냈다. 아빠가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그걸 뺏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스스로 하시거나 엄마를 닦달하거나 나를 시켰다. 할머니가 집에 오시면 자잘한 심부름은 내 일이었다. 한겨울에 동생 간식거리를 사 오라거나 2살 차이나는 동생 양말을 신겨주라거나 등등.
모든 전화에 할머니는 남동생부터 찾았다. 반에서 4등 했다는 남동생의 말에 할머니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전교 3등을 했다는 나의 말은 잊은 지 오래였다. 한의사가 된 후 할머니는 처음으로 나를 찾았다. '나'가 아니라 한의사 손녀를 찾았다. "B냐? 할미 죽겠다. 이번 주말에 와서 진료 좀 봐라." 나는 기를 쓰고 핑계를 찾아야 했다. "할머니 저 이번 주말에 약속 있어요."
초등학생 때 할머니가 처음으로 나에게 선물을 줬다. 빨간색 물고기가 달린 목걸이였다. 목걸이가 아니었으면 남동생을 주었을 것이다. 왜인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선물을 받았다. 처음으로 남동생의 누나가 아닌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 목걸이가 유일하게 할머니를 나의 할머니로 있게 했다. 아프다고 전화가 오면 한 번은 건너뛰더라도 그다음 한 번은 결국 찾아가게 했다.
할머니는 배웠던 그대로 며느리를 종처럼 부렸다. 종처럼 부려도 할머니는 증조할머니를 모셨지만 시대가 변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말년에 외로이 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집에서 홀로 20년을 더 사셨다. 요양병원도 오며 가며 사셨다. 돌아가시는 순간도 갑작스러워서 홀로 가셨다.
장례식이 끝난 후 남은 짐을 챙기러 할머니의 집에 들렀다. 할머니 방은 언제나 등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은 불이 켜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는데 사람과 불만 사라졌다. 아마 앞으로도 불이 켜질 날은 없을 것이다. 깜깜한 창문을 보며 물고기 목걸이가 생각났다. 약속 있다던 나의 주말이 생각났다. 먼 옛날 아홉 식구가 살던 집은 이제 빈 집이 되었다. 나는 계속 물고기 목걸이가 생각났다.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