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주 Mar 16. 2020

진짜 너를 보여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주준영

인생이 지겨울 땐 역할극을 하자


 언젠가 아는 선배가 말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정말 그들이 사는 세상일 뿐, 실제 방송국에서 벌어지는 일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나는 그 말을 믿는 체했지만 사실 믿지 않았다. 나는 방송국에 들어가서 정지오 같은 선배를 사귀고 ‘선배, 너는’이라고 불러가며 제멋대로에 냉정하지만 순수한 주준영이 되고 싶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본 이후부터 나의 이상형은 줄곧, 당연히, 주준영이었다. 그의 어떤 점이 날 설레게 했던 걸까. 이번 주에는 영화 비평 대신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영화도 그렇지만, 미디어 쪽은 특히 일이 고되다. 그들은 능숙하고, 뭐든 아는 것 같은 비관적인 말투를 쓰며, 그들만의 농담에 웃는다. 방송국에서 짧게나마 일해본 나는 그들이 어떤 세상에 사는지 너무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방송국이라는 작은 섬에 사는 것이다. 근방에서 모든 물건의 수급이 가능하고,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굳이 나갈 필요도 이유도 없다. 나와 함께 일했던 선배 PD는, 제일 세상과 가까워야 하는 게 이 일이지만 일을 하면서 세상과 고립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들은 확실히 그들만의 세상에 산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볼 때만큼은 그들처럼 말하고, 그들처럼 일하며, 그들처럼 웃고 싶어 진다. 확실히 그들은 고립되어 있고, 자신들과 ‘일반인’들을 다른 선상에 두고 종종 관망하곤 한다. 혹은 모든 인간에게 거부감 및 혐오감을 갖는 부류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간에게서 벗어나 드라마로, 캐릭터로, 이야기로 향할수록 더욱 인간과 마주해야만 하는 야속한 운명을 타고났다. 인생이 지겨워 역할극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진짜 배우, 감독들, 스태프들 등 진짜 인간들과 씨름하고 있더라는 웃지 못할 사연이다. 


세 줄 요약


 주인공인 주준영은, 드라마국에서 PD를 하고 있다. 미니시리즈로 데뷔했고, 장편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 같은 국에 근무하는 정지오와는 예전 연인 관계였다. 준영이 드라마를 찍기 위해, 그리고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인간을 연구하고 알아가며 이해하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다. 


 휴먼 드라마지만 결국 연애 얘기로 연결되더라는, 뻔하디 뻔한 드라마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 드라마는 철저히 연애 얘기며, 모든 캐릭터들이 연애를 하고 사람을 사귄다. 좋은 건 섬세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작가의 특성상 캐릭터들이 참 일관되게 안 바뀐다는 거다. 사람이 안 바뀐다는 얘기, 진짜다. 사람은 정말 끈질기게 안 바뀐다. 사실 바뀔 이유도 별로 없다. 극단적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캐릭터가 180도 바뀌어 나오는 연예인들이 많으니 사람이 노력하면 바뀌는 거구나 하겠지만 그건 모두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구다. 그때그때 태도가 바뀔 뿐 사람은 여전하고 그런 여전함이 서로를 안심시키기도 화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또다시 연애에 실패한 준영은 예전 애인이었던 정지오에게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꽤 이타적이고 신뢰받는 직업인이자 좋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그 이타적인 성격 때문에, 대학 때부터 사귐과 헤어짐을 반복한 유부녀 애인과 여전히 질척이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다가오는 준영에게, 지오는 그를 골려볼까 싶어 일부러 더 냉정하게 굴고 슬슬 건든다. 화가 오를 대로 오른 주준영이 정지오에게 있는 말 없는 말을 쏟아붓기 시작하자, 그제야 지오는 준영을 놓아주고, 그들은 극적으로 화해한다. 그들의 두 번째 연애와 함께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왜 두 번째이겠는가. 그들은 또다시 틀어지고 싸우기 시작한다. 지나치게 이타적인 지오와, 지나치게 이기적인 준영. 누가 더 잘못했고, 누가 포기해야 하는가. 


진짜 너를 보여줘


 준영은 다르다. 준영은 외모처럼 귀엽고 순진하지 않으며, 막무가내로 사랑을 갈구하거나 매달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맹렬히 비판하고 배짱 있게 덤비며 싫음 말아, 하는 승부사 성향도 아니다. 준영은 말하자면 둘 다인데, 그게 참 헷갈리면서도 묘하게 일관성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준영은 솔직한 편이다. 솔직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표현이 부족하면 즉각적으로 알아채고 더 달라고 조른다. 그런 면에서 순진해 보이다가도, 상대가 일적인 문제로 치사하게 굴거나 방해하면 '난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네 이런 점은 네가 잘못된 거다'라고 냉정하게 끊어내 버린다. 그러다가도 상대가 진짜 가버리면, 왜 가냐며 억울한 사람인 척하고 감정이 상한 걸 그대로 표현해버린다. 준영의 이 일관성 없는 일관성이 매력적인 건 무엇보다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다. 확실히 준영은 지오처럼 후배와 선배를 챙기고, 적당히 애교도 피우고 정치질도 하며 결과적으로 다 같이 잘 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준영은 현재 떠오른 본인의 감정 자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감정이라는 건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길을 가다 웅덩이 근처로 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물이 팍 튀는 것처럼, 굉장히 일시적으로 생성되는 일련의 반응들이다. 좋은 사람을 싫어하기 힘들고 싫은 사람을 좋아하기 힘든 것처럼, 준영은 자신의 감정이 튀어 오르는 모양에 가장 집중하고 그 감각을 토대로 말을 하고 드라마를 찍는, 직관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에 반해 지오는 순간적인 판단력이 약해 트렌드에도 약하고, 그래서 동료들이 '재미없는 드라마'라고 놀리는 꽤 고전적인 작품을 찍는다. 그는 포괄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정서에 강하고, 어떤 것이든 초래할 결과를 먼저 숙고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지오는 말을 아끼고, 대답을 피하고, 상황을 회피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현재에 충실한 준영에게는, 현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그야말로 지옥이다. 


 연애를 하다 보면 우리는 진짜에 대한 갈망에 휩싸이게 된다. 상대가 하고 있는 말이 얼마만큼의 진심을 담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곧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준영은 지오의 진심이 알고 싶어 애원해보고 비난도 해보지만, 불행하게도 지오는 말하는 법 보다 숨기는 법을 먼저 배운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는 솔직해지고 싶을 때 소리치는 말로 무마했다. 그렇게 행동하던 과거의 자신이 싫으니 그냥 말을 아끼고 도망쳐 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답답하게 구는 그에게 어떤 타당한 이유가 필요하다고 믿었는지, 지오에게 유전병이라는 가혹한 짐을 짊어지게 한다. (그러지 않고선 그의 캐릭터가 도저히 납득 불가라고 판단했던 걸까.) 반면 준영에겐 샌드백이 없다. 그는 그냥 성격 더럽고 솔직하고 이기적이어서 그런 걸로 정리된다. 억울할 법도 한데, 아닌 척할 법도 한데 그는 꿋꿋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쓰고 고생을 한다. 안쓰럽고, 쪽팔리다가, 나중엔 서서히 지친다. 아니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100퍼센트의 진심을 고백한 적이 있었을까? 욕구에 대한 갈망 앞에,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자신으로 상대를 대하는 준영처럼 말이다. 말은 와전된다. 아무리 직접적이고, 솔직했어도 와전되기 마련이다. 말의 법칙을 잘 아는 지오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준영은 그런 식으로 배려할 줄은 모른다. 다만 계산적으로 굴지는 않는다. 지오가 말을 아끼는 게 결국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그 이기심을 잘 알면서도 그가 진심을 내놓을 그 순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이해가 되든 몰이해가 되든, 그는 그저 계속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다. 악에 받치고 질려서 연애와 관련 없는 일에도 영향을 주고 그를 괴롭히려고 들지는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아닌 척하며 물러나지는 않는다. 좋자고 만났으니 좋게 좋게 하면 안 되는 걸까? 우리는 그 작은 '좋음'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불편함을 감내하곤 한다. 나답지 않은 말, 내가 아닌 행동들로 포장하고 그의 좋음에 맞추거나,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좋음에 맞추려고 말이다. '저 정도로 솔직하면 최소한 속은 시원하지 않을까?', '나는 언제 저렇게 내 감정을 드러냈는가, 나는 내 감정에게 과연 좋은 주인인가.' 한 번쯤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그 필요를 준영이 몸소, 부딪치고 깨지며 보여준다. 그는 사랑에 실패한 모두의 대변인이며, 가장 창피한 모습이며, 가장 솔직한 모습이 되어준다.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한 번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랬던 나, 그러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며 우리는 준영을 사랑하게 된다. 


애매한 결론


 나는 여전히 역할극을 한다. 나는 갑 너는 을. 나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 너는 덜한 사람. 나는 타협하는 사람 너는 절대 맞춰가지 않는 사람. '내가 되고 싶은 나' 중에 진짜 나는 얼마큼일까. 누군가 진짜 나를 발견하고 끌어내 줄 수 있긴 한 걸까? 수많은 연애 얘기를 듣고 보아도 어쩐지 실력은 늘지 않고 진짜 나와는 멀어져 갈 때, 나는 주준영을 떠올린다. 진짜 나를 찾고, 진짜 그를 찾기 위해 내달리던 모습을 말이다. 이 드라마가 나온지도 벌써 12년이 되었다. 그들을 추억하는 사람이 여전히 여기에 있다. 

작가의 이전글 몸, 몸, 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