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호텔들, 그런데 하루는 늘 밖에 있었다

호텔편 2|사이공, 하이엔드를 해석하는 도시

by 이서하


칸쿤을 떠난 뒤, 나는 오랫동안 그 경험을 예외로 받아들였다. 그 이후 6년 동안, 나는 많은 호텔을 경험했다. 라스베이거스, 코사무이, 호치민. 모두 좋았다. 어떤 곳은 넓었고, 어떤 곳은 화려했고, 어떤 곳은 쾌적했다.


하지만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호텔을 방문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됐다.


"여기서 하루를 전부 보내도 괜찮을까?"


그 질문의 답은 대부분 명확했다.


"아니, 나가야 한다."



라스베이거스, 귀국길의 경유지


오랜 해외 체류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에 들르기로 했다.


"여보, 라스베이거스 어때?"

"카지노의 도시?"

"응. 근데 호텔도 엄청 싸대. 스위트룸이 하루에 20만 원도 안 한대."

"...진짜?"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응. 그냥 한 번 가보자. 어차피 경유해야 하니까."


택시 창밖으로 보이는 라스베이거스의 네온사인. 거대한 호텔들이 줄지어 선 풍경. 우리는 웃으며 호텔로 향했다.


The Palazzo at The Venetian — 스위트룸이 기본인 호텔


라스베이거스는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장치 같다. 그 장치의 목적은 명확하다.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


The Palazzo at The Venetian.


이 호텔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말 그대로 규모가 미쳤다"였다. 객실 수만 수천 개. 호텔이라는 말보다 '단지'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아내가 멈췄다.


"여보... 방 크기 좀 봐."

"응. 여기는 전 객실이 스위트룸이래."

"헐..."


거실이 있고, 침실은 반 층을 내려가는 계단식 구조였다. 널찍한 소파, 큰 창문, 그리고 욕실은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아내가 침대에 뛰어들었다.


"여보, 여기서 10일 산다!"

200달러도 안 되는 스위트룸에서의 10일. 쇼핑백들이 쌓일수록 우리는 도시의 속도에 적응해 갔다.

베니스가 된 실내몰


로비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갑자기 또 하나의 도시가 나온다. 하늘색 천장 아래에 물길이 흐르고, 인공 운하 위로 곤돌라가 다닌다. 가게들은 베니스 거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이어져 있었다.


"여보, 이거 진짜 배 타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처음엔 그저 재밌었다. 역시 미국은 스케일이 달랐다.

실내에 만들어진 가짜 하늘. 이곳은 밤낮의 구분을 없애 오직 소비에만 몰입하도록 설계된 거대한 세트장이다.

호텔들이 연결된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특이한 점은 호텔이 단일 시설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도시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호텔이 있는데, 객실이 아닌 실내몰이나 카지노 공간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여러 호텔을 돌아다녔다. 윈호텔의 '더윈뷔페'에서 식사를 하고, 분수쇼가 유명한 벨라지오 호텔에서 '오쇼'를 관람했다.


"여보, 여기 뷔페 진짜 대박이다."

"맞아. 50불인데 이 정도면 가성비 미쳤어."

라스베이거스의 뷔페는 식사가 아니라 탐욕에 가깝다. 호텔 안에서 모든 욕구가 해결되는 구조.

오쇼는 수중 공연이었다. 아크로바틱과 예술이 결합된 무대는 압도적이었다.


"와... 진짜 대단하다."

"응.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아."


스케쳐스, 그리고 작은 선물


어느 날 오후, 호텔 지하 아케이드의 쇼핑몰을 걷다 아내가 스케쳐스 매장 앞에서 멈췄다.


"여보, 저 신발 좀 귀엽지 않아?"


잠시 신발을 보더니 아내가 걸음을 옮겼다. 사고 싶은데 참는 눈치였다. 나는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매장에 들어가 아내 사이즈의 신발을 샀다.


"여보, 이거."

"...뭐야?"


쇼핑백을 본 아내의 눈이 커졌다.


"방금 샀어."

"여보, 고마워... 나 정식으로 선물 받는 거 처음이야."


아내가 신발을 신어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보, 귀국길에 우리... 사랑의 약속 같은 거로 커플 아이템 하나 맞추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같이 찾아보자."


돈의 가치가 무감각해지는 도시


다음 날, 우리는 까르띠에 매장으로 향했다. '탱크 솔로' 시계를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사지 않았다. 큰맘 먹고 사기엔 아내가 원하던 옵션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우리는 수백만 원짜리 시계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돌아섰는데, 거리를 걷다 보면 돈의 가치가 무감각해지는 풍경들이 보였다.


호텔 입구 근처에 노숙자가 앉아 있었다. 카지노 테이블에는 넋이 나간 듯 멍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치와 향락의 도시. 그 이면에는 무너진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행복하게 웃으며 쇼핑을 할 때, 누군가는 마지막 돈을 테이블에 걸고 있었다.


창문 없는 카지노, 시간을 잊게 하는 설계


여기는 호텔 안에서 하루가 완성되는 구조라는 점에서는 칸쿤과 비슷하다. 쇼핑, 식사, 공연, 수영장, 카지노까지. 엘리베이터만 타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그런데 감정의 결이 달랐다. 칸쿤에서의 하루 설계가 '회복·여유·휴식'에 가깝다면, 라스베이거스는 '흥분·자극·소비'였다. 특히 창문도 시계도 없는 카지노는 사람들의 시간을 삭제하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호텔이 매력적이라서가 아니라, 카지노로 연결되는 동선의 최종 목적지가 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 바로 옆에는 무너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라스베이거스가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하루'를 설계하는 호텔이 되지 못한 이유였다.


"칸쿤의 하루는 나를 정리시켰고, 베가스의 하루는 나를 태웠다."


나는 그 차이를 정확히 느꼈다. 하루 설계가 된다는 것과, 하루를 온전히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10일 후, 귀국


10일이 금방 지나갔다. 마지막 날, 객실을 정리하며 아내가 말했다.


"여보, 여기 진짜 재밌었다. 근데... 10일 넘게 계속 있었으면 좀 지쳤을 것 같아."

"맞아. 여기는 자극이 너무 많아."


아내가 새로 산 스케쳐스를 신으며 웃었다.


"그래도 좋은 추억 많이 만들었어. 특히 이 신발."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호텔을 나섰다.



코사무이 풀빌라 — 완벽했지만, 하루는 흘러가지 않았다


라스베이거스의 과잉이 피곤했다면, 정반대의 선택은 어땠을까. 기억은 다시 신혼여행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혼 전후로 회사 일이 너무 바빠 여행지를 고를 시간조차 없었다. 동료의 추천으로 선택한 코사무이의 '인피니티 풀빌라'. 연예인들이 간다는 그곳은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약속했다.


처음의 인상은 완벽했다


풀빌라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장미꽃이 뿌려진 길이 펼쳐졌고, 침대 위에는 백조 장식이 우리를 맞았다.


"와... 여보, 이거 완전 영화 같은데?"


실내는 널찍했고 모던했다. 회색빛의 차갑고 현대적인 모던 인테리어. 부자들의 개인 저택처럼 보였고, 오직 우리 둘만의 공간이었다.

빌라 내부의 월풀 욕조. 차갑고 모던한 인테리어는 완벽했지만, 어딘가 온기가 부족했다.

벽 한쪽의 폴딩도어를 열면 오직 우리 둘만의 프라이빗 풀이 기다리고 있었다. 높은 담장은 외부의 시선을 완벽히 차단했다. 문을 열면 바람과 물만 있었다.


"여보, 여기 진짜... 미쳤다."

"응. 완벽해."


첫인상만 놓고 보면 어떤 호텔보다 완벽했다. 별다른 설명도 필요 없었다.

독채 수영장에서 바라본 바다. 시야에는 오직 푸른색뿐, 완벽한 고립이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


첫날은 패키지 일정으로 채워졌다. 청록색 바다를 보고, 팟타이를 먹고, 럭셔리한 '황제 스파'를 받았다. 월풀에서 캔들 불에 머리카락을 살짝 태우는 소동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즐거운 추억이었다.


둘째 날은 스냅 촬영이었다. 작가의 지시에 따라 하루 종일 웃고 포즈를 취했다. 저녁에 빌라로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지쳐 잠들었다.


셋째 날 오후 —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셋째 날은 완전한 자유 일정이었다. 아침에 수영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오후가 되었다.


수영장 옆 라운지에 누워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할 일도 없었다.


"여보... 심심해."

"나도."

"우리 뭐 해?"


침묵. 책을 봤다 덮고, 핸드폰을 켰다 껐다.


"여보, 나가고 싶어."

"나도 그 생각 했어. 탈출하자."


탈출, 리듬을 찾아서


하지만 택시도, 호출 앱도 응답이 없었다. 폐쇄적이라는 말은 나가기조차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냥 걸어 내려갈까?"

"...진짜?"

"응. 여기 있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우리는 비포장 돌길을 30분 동안 걸어 내려갔다. 신혼여행에서 탈출이라니. 해변가 작은 식당이 보였을 때 우리는 환호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풋팟퐁 커리와 맥주를 마셨다.


"아… 살 것 같다."

"나도."

"여보, 빌라에서는 왜 이런 기분이 안 들었을까?"


그 순간 깨달았다. 코사무이 인피니티 풀빌라는 프라이버시의 끝이었지만 하루를 움직이는 리듬이 부재한 공간이었다.


좋은 공간은 많다. 하지만 '하루'는 공간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루는 리듬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리듬은 아무리 훌륭한 풀빌라라도 자동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소피텔 사이공 — 도시가 하루를 뺏어가다


라스베이거스의 자극과 코사무이의 고립을 겪고 난 뒤, 나는 호치민이라는 도시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친한 동생 K와 함께 1군 중심가에 있는 소피텔 사이공 플라자(Sofitel Saigon Plaza)에서 호캉스를 하기로 했다.


"그래, 오늘은 호텔에서 얌전히 쉬자."


완벽한 5성급의 오후, 그리고 라멘의 유혹


로비는 우아했고, 객실 뷰는 훌륭했다. 옥상 수영장에서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내고 객실로 돌아왔다. 완벽한 호캉스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30분쯤 지났을까.


"형, 출출하지 않아요? 일본인 거리가 바로 근처인데 라멘 먹고 올까요?"


소피텔은 위치가 너무 좋았다. 후문으로 나가면 호치민의 리틀 도쿄, 레탄통(Le Thanh Ton)이 바로였다.


"갔다 올까? 금방 먹고 들어오면 되잖아."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호텔 문을 나서는 순간, 호치민의 습하고 뜨거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일본인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호캉스'라는 목적을 잊어버렸다. 돈코츠 라멘 국물을 들이키고, 맥주를 한 잔 시켰다.


"캬... 역시 나와서 먹는 게 맛있네요."

5성급 룸서비스를 단번에 잊게 만든 라멘 한 그릇과 맥주. 이것이 도시의 맛이다.

끝나지 않는 밤


라멘을 먹고 나오니 간판 없는 히든 바가 보였다. 칵테일을 마시니 야경이 보고 싶어져 루프탑 바 '글로우(Glow)'로 향했다. 거기서 끝내기 아쉬워 재즈바 '래빗홀(Rabbit Hole)'까지 갔다.

"한 잔만 더?" 그 한 잔이 밤을 길게 만들었다. 래빗홀에서의 칵테일.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다음 날 아침, 숙취와 함께 조식을 먹으며 생각했다. 소피텔은 완벽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전날 밤의 도시 탐험이었다.


체크아웃을 하며 계산서를 봤다. 룸서비스 내역 '0원'. 우리는 5성급 호텔을 수영장 딸린 잠만 자는 숙소로 써버린 것이었다.

새벽 2시의 복귀. 소피텔 초콜릿과 편의점 생수만이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 호텔은 결국 잠만 자는 곳이 되었다.

호텔이 도시를 이기지 못할 때


나는 K와 헤어지며 생각했다.


"호텔이 아무리 좋아도, 도시가 더 매력적이면 사람들은 밖으로 나간다."


이것이 대부분의 좋은 호텔들이 가진 딜레마였다. 호텔이 '목적지'가 되려면, 호텔 안의 경험이 호텔 밖의 도시를 압도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곳이 과연 있을까? 이 시끄럽고 활기찬 호치민 도심 한복판에서, 도시의 유혹을 차단하고 온전히 그 안에서만 머물게 만드는 곳이?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건물을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는.



INTERLUDE: 진입 코드


Times Square, 기묘한 발견


어느 날, 1군 도심을 걷다가 기묘한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Times Square. 상업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화려하지만 목적이 불분명한 건물.


호기심에 건물 뒤편으로 가보았다. 간판도, 화려한 호객 행위도 없는 호텔. 하지만 공기의 무게만으로도 격을 드러내는 공간. The Reverie Saigon.


"여기... 호텔이구나."


로비로 들어갔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샹들리에. 이탈리안 대리석 바닥.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첫 방문, 그리고 실패


호기심에 가장 기본적인 'Deluxe Room'을 예약했다. 방은 넓었고 고급스러웠지만, 특별한 체감은 없었다. 소피텔이나 인터컨티넨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The Reverie? 과대평가된 거 아냐?"


그때 문득 D군의 말이 떠올랐다. 인터컨티넨탈 라운지에서 그가 시켜줬던 히든 메뉴, 망고.


"형, 그 음식은 라운지에 나와 있지 않다. 아는 사람만 먹을 수 있어."


그제야 이해했다. 진짜 세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접근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들어갔던 디럭스 룸은 이 호텔의 겉면에 불과했다. The Reverie Saigon은 호텔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세계로 진입하는 코드는 키(Card)가 아니라 ‘등급’에 달려 있었다.


몇 달 후 결혼기념일. 나는 예약 화면을 열고 객실 카테고리를 천천히 읽었다.

Deluxe Room

Premier Room

Junior Suite River View


이번에는 달랐다. Junior Suite를 선택하고, 클럽 라운지 접근권이 포함되어 있다는 문구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보자."


예약 확정 버튼을 눌렀다.


이미지 출처

커버이미지 & 본문 — All photos ⓒ 이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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