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라는 오래된 오해를 걷어내다

프롤로그 1|사이공, 하이엔드를 해석하는 도시

by 이서하


도시가 나를 시험한 첫 밤


비행기는 밤의 습기를 가르며 떤션넛 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어둡고 작은 공항. 오래된 간판들. 한국의 오래된 지방 공항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곳이 동남아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특별한 기대나 충격을 느끼진 않았다. 이곳이 내가 앞으로 몇 년을 살아야 할 도시라는 사실만이 조금 무겁게 내려앉았다.

떤션넛 공항 — 도시는 공항이 아니라, 편견을 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 이서하

공항 문이 열리자 후끈한 공기가 얼굴을 덮었다.

택시 승강장으로 가는 길, 짙은 습기와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공기 속에 낮게 깔려 있었다. 택시에 올라타자 낡은 시트에 플라스틱 커버가 덧씌워져 있었다. 기사 옆자리엔 작은 불상이 붙어 있었고, 계기판 위에는 오래된 휴대폰이 GPS 대신 쓰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바이크가 끝없이 흘렀다. 신호와 상관없이 물결처럼 흐르며 차선 사이를 비집고 나아갔다. 한국에서라면 혼란이라고 불렀을 장면은 이곳에서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나는 창문 밖을 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상상하던 동남아의 모습이네.'


조금 덥고, 조금 거칠고, 조금은 낙후된 곳. 한국에서 우리가 쉽게 소비하던 이미지 그대로였다. ‘가성비 여행지’, ‘값싼 물가’, ‘시간이 멈춘 도시’ 같은 말들이 이 장면에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코사무이에서 보냈던 며칠의 휴양이 떠올랐다. 바다와 리조트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동남아의 현실이 아니라 관광객을 위한 무대였다. 그 뒤편의 도시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동남아는 결국 이 정도구나.”


그러나 그 생각은 아주 짧은 순간에 균열을 맞았다.

택시는 사이공 강을 건너 도시의 1군으로 진입했다. 그 순간, 도시의 결이 바뀌었다. 갑자기 시야가 확 열리고, 어둠 위로 빛이 솟구쳤다. 네온사인이 매달린 건물들이 계단처럼 겹쳐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유리 커튼월을 입은 빌딩들이 새벽빛에 반짝였다. 그리고 그 위로 비텍스코 파이낸셜 타워가 도시의 중심을 뚫고 올라가 있었다. 그것은 광고나 여행 브로슈어에서 보던 ‘꾸며진’ 장면이 아니었다. 도시가 실제로 내뿜는 실루엣이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동남아가 아니다.'

비텍스코 타워 야경 — 야경은 화려함이 아니라, 도시가 가진 의지를 드러낸다 ⓒ Thể Phạm / Pexels



오래된 필터가 깨지다


오래된 필터 — 동남아를 ‘값싼 여행지’로만 보던 내 시선 — 이 깨지는 순간, 나는 이 도시를 처음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도시는 낮보다 밤에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낸다. 호치민도 그랬다. 택시는 1군 중심부로 깊숙이 들어섰고, 나는 창밖에서 이상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분명 낯설었지만, 동시에 낯설지 않았다. 무엇인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 혼란이 아닌 흐름, 무질서가 아닌 어떤 ‘리듬’이 있었다.


길가마다 작은 플라스틱 의자와 낮은 테이블들이 촘촘히 놓여 있었다. 밤인데도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카페는 문을 닫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늦을수록 더 많은 대화가 거리 위에 쏟아졌다. 이 장면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도시의 생활 리듬”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사람들은 바쁘지 않았지만 멈추지도 않았다. 이 도시는 흘렀다.

로컬 카페 거리 — 이 도시는 쉬지 않는다. 그러나 서두르지도 않는다 ⓒ mitbg000 / Pexels

조금 더 달리자, 도시의 결이 다시 바뀌었다.

식민지 시절의 흔적을 품은 건축물들이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오페라 하우스의 파사드는 우아했고, 노트르담 대성당은 고요한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건축의 선과 비율이 남겨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주변에는 현대적인 상업 구역이 자연스럽게 붙어 있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고 있었다. 도시가 시간을 쌓는 방식이 한국과 달랐다. 한국이 낡은 것을 부수고 새것을 세우는 방식이라면, 이 도시는 겹쳐 쌓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보였다.


비텍스코 타워가 가까워질수록 길은 더 깨끗해졌고, 횡단보도에는 신호가 없는데도 오토바이 흐름은 일정하게 지나가고 멈췄다. 처음엔 혼란처럼 보였던 그 흐름이, 알고 보니 묘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의 교통은 규칙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상호 합의의 감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클락션과 속도, 시선이 신호였다. 이건 혼돈이 아니라 ‘합의된 질서’였다. 그날 이후, 나는 도시를 보던 시선을 거꾸로 돌리기 시작했다. 표면이 아니라, 그 표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도시의 밀도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문을 닫는 가게보다 불을 밝히는 가게가 더 많았다. 미용실도, 카페도, 작은 레스토랑도 마찬가지였다. 이 도시는 하루를 끝내지 않았다. 시간이 연속적으로 확장되는 도시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도시의 강이 나타났다. 사이공 강을 따라 늘어선 리버사이드 빌딩들의 불빛이 물결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풍경은 관광 사진에서 보던 ‘예쁜 야경’의 차원이 아니었다. 도시는 정적이 아닌 심장박동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기대 잠시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이 도시는 대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걸까?'

눈앞의 장면은 분명 동남아였다. 그러나 내가 알던 ‘싸고 후지지만 정겹다’는 이미지 속의 동남아는 아니었다. 이 도시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설계’ 같은 것.

그리고 그 전환점은, 내가 처음으로 이 도시에서 ‘산다’는 감각을 느낀 그곳에서 더 분명해졌다.



‘집’이 아니라 ‘생활 시스템’이었다


택시는 강을 건너 7군으로 향했다. 도시는 다시 한번 표정을 바꾸었다.

1군이 빛과 속도의 도시였다면, 7군은 질서와 여백의 도시였다. 도로는 넓고 깨끗했고, 가로수는 이상하리만큼 단정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밤인데도 불안하지 않았다. 도시는 조용했지만 멈추지 않았고, 정리되어 있었지만 생기를 잃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던 동남아의 도심과 달랐다. 이곳에는 ‘생활’을 설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첫 숙소는 Happy Valley Apartment였다.

해피밸리 7군 — 여기는 주거가 아니다. 생활을 설계한 시스템이다 ⓒ 이서하

이름만 들으면 흔한 중저가 아파트 같았지만, 현관에 들어선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건 주거가 아니라 ‘생활 시스템’이다. 정돈된 보안 라운지를 지나 단지 안쪽으로 들어서자, 조용한 물소리와 바람이 나를 맞았다. 아파트 중앙에는 길게 이어진 수영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 수영장은 단순한 편의 시설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쉬고 걷고 대화하는 생활 동선의 중심처럼 설계되어 있었다. 물가를 따라 산책로가 이어졌고, 곳곳에 벤치와 조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조깅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공간 속에서 각자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는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가 넓었다. 한국의 신도시 아파트처럼 층수와 동 간 거리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려 밀도로 승부하지 않았다. 대신 시야가 열려 있었다. 공기가 흐르고, 시선이 막히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호텔보다 편안했고, 도심 오피스텔보다 기능적이었다. 그런데 가격은 믿기 어려울 만큼 합리적이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설계의 결과였다.


내 숙소는 대단히 특별한 인테리어를 가진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조는 달랐다. 거실과 발코니가 하나의 공간처럼 이어져 있었고, 벽 대신 유리창이 외부와 내부를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사적인 공간은 확보하면서도, 시야와 공기는 막지 않는 방식. 이곳 사람들은 굳이 나가거나 이동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감각’을 유지하도록 공간을 설계해 두고 있었다. 나는 그게 낯설었다. 그리고 그 낯섦이 곧 호기심으로 변했다.


'왜 이 아파트는 호텔보다 편안할까?'
'사람들은 왜 여기서 굳이 서두르지 않을까?'
'내가 보지 못한 ‘다른 삶의 구조’가 있는 걸까?'


그날 밤, 나는 도시와 공간이 사람의 하루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도시는 가격이 아니라 구조를 통해 사람의 삶을 설계한다.
그리고 호치민은 바로 그 지점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커버이미지 — 베트남 호치민시의 밤 스카이라인 ⓒ Tường Chopper / Pexels

본문 — Bitexco Financial Tower in Ho Chi Minh at Night ⓒ Thể Phạm / Pexels

본문 — 아시아 골목길의 활기찬 나이트라이프 ⓒ mitbg000 / Pexels


다음 화 "프롤로그 2 |가치는 가격이 아닌 구조에서 태어난다" 에서는
하이엔드라는 개념이 어떻게 ‘공간’과 ‘도시’의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사이공이라는 도시가 그 해석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다음 편은 수요일에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