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_<트루먼쇼>
기생충의 암울함, 표백의 막막함
보고 나면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느낌이 드는 콘텐츠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봉준호의 <기생충>, 장강명의 <표백>. 기생충이 21세기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면 표백은 기생충을 봤을 땐 암울했고 표백을 봤을 땐 막막했다.
내가 느꼈던 지본주의의 부조리를 이토록 '명징'하게 '직조'하다니! 너가 느꼈던 자본주의의 부조리가 뭔데라고 질문한다면 묘한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하는 드론 사진작가 자니 밀러의 '불평등 장면들'이란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요..'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맴도는 그의 사진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재미까지 곁들어 '너가 느끼던거 이거 아니야?'라고 정리한 영화가 바로 기생충. 영화 속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변하지 않는 박사장네 2층집이라는 점에서 희망이 없어 보였고 그 지하실은 언제나 누군가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했다.
장강명의 <표백>은 거대 담론을 잃은 현시대에 청춘들이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혁명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린다. 그 방법은 바로 '자살'! 이 이야기 속 핵심 인물은 자살만이 21세기 균열을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논리정연하게 주장한다. '표백'은 이 시대가 청춘들의 형형색색 점으로 이루어진 점묘화가 아닌 더할 것도 뺄것도 없이 표백된 상태라는 의미의 메타포다. 태어나서 '죽고싶다'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냐마는 우리 시대의 '죽고싶다'는 뉘앙스가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요즘. 그 말은 실존적 고뇌에서 비롯된 질문도 아니며 관용어를 포함한 가벼운 농담도 아닌, 고통과 슬픔이 얼마간 섞여 있는 진지한 말이고 그래서 섬뜩하다. 자살만이 청춘의 존재감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라면, 막막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생충과 표백은 묘하게도 더러움과 깨끗함의 상징으로 대비된다. 어디에도 출구가 없어 막막함이 깔끔하다고까지 느껴지는 미로앞에서 우리는 더럽게 암울해질 수밖에.
작가들은 허구로 진실을 말하기에 이들이 만든 세계가 사진을 찍어 인화한 듯 우리 시대의 정확한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과연 그럴까? 사회학자 이철승은 저서 <불평등의 세대>에서 386 세대의 정치권력, 경제권력의 독점이 그 30년 뒤 세대인 지금의 2030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통계 사례로 증명한다. 파이가 줄어든 청춘들에게 도전을 요구하는 시대에 막막함을 느끼는 건 당연지사. 자본주의 불평등 확대 현상 역시 대다수의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증명되었다.
지금은 하도 탈출해야 할 문제들이 많아 그 인기가 시들해진 것 같지만, 방탈출이 뜨거운 바람일 때, 딱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다. 왜 있지 않은가, 분위기에 취하면 진짜 그 주인공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나는 어릴 적 형과 반지의 제왕 놀이를 할 때도 원피스 놀이를 할 때도 한 역할에 취하면 그 역할에 열과 성을 다하는 연기파였다. 그날의 방탈출 컨셉도 미제 살인사건? 비스무리한 것을 푸는 형사들이 모인 방 컨셉이어서 친구들과 진지하게 몰입해 범인 색출작업에 들어갔다.
빈라덴 사살 작전 생중계 장면을 지켜보는 펜타곤의 오바마 행정부처럼, 우리는 사안의 중대함에 대해 먼저 토론하기 시작했다. 다들 침착해. 증거는 다 이 방 안에 있어. 여기 써 있는 글자는 뭐지? 소화기? 중대한 힌트일지 몰라. 그건 진짜 소화기의 위치를 표시하는 문구였다. 우당탕탕 뭐라도 한 번 해보자.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다보니 어찌 저찌 철장을 풀고 했던 기억이 난다. 관문을 하나씩 깨어서 나아가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그 내용은 그다지 인상 깊지는 않았고 하나 특별히 기억남는 건 있었다. '힌트 찬스'.
찬스는 총 2번 사용할 수 있었는데 방탈출 관리자, 즉 사람을 가두고 이를 지켜보는 사디스트적 놀이기구의 설계자와 무려 '통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통화를 하면 설계자는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키워드를 던져주었다. 매우 만족도가 높은 직업일 것이 틀림없었다. 힌트에 목매는 불쌍한 양들을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 우월감과 여유! 자존심이 상했고 그래서, 우리 이거 끝까지 쓰지 말고 풀어보자라고 다짐했다. 5분만에 자신의 핸드폰이 사라졌음을 주장하는 친구가 혹시 핸드폰을 밖에 두고 왔는지 물어보기 위해 한 번을 어이없게 썼지만... 아무튼! 내게는 그 찬스를 썼던 기억이 묘하게 다가온다. 그 통화는 연기파였던 내가 상황에 물들어 젖어있는 상태를 한꺼풀 벗기게 도와주었다. 이건 그냥 놀이에 불과하며 눈앞의 이 잔혹한 살인사건 역시 가짜다. 맞아, 이거 다 가짜지. 그 마음은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뭐든지 과몰입은 금물이다.
(영화 <트루먼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방탈출에서 얻은 깨달음을 감히 이 세상에 적용해보려고 한다. 지금의 삶이, 사회가, 세상이 철학적 관점에서든 사회학적 관점에서든 정치적 관점에서든 출구 없는 미로처럼 느껴질 때, 막막함 or 암울함에 과몰입은 금물! 과몰입으로 스스로를 괴로움에 허덕이게 했던 때 나를 깨워준 자막 달린 장면은, 바로 <트루먼 쇼>의 두 장면이다. 간단히 두 장면을 설명하자면,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삶이 쇼프로그램으로 연출되어 있음을 깨달은 트루먼(짐 캐리)이 세트장 밖으로 나가려 하기 직전, 이 쇼의 연출자이자 기획자인 크리스토프(애드 해리스)가 그를 말리며 대화하는 장면이다.
전부 가짜였군요
자넨 진짜야
삶이 출구없는 미로라고 느껴진다면 그 미로가 가짜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미로는 실제로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불안과 근심과 공포가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말은 세상의 부조리함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는 진짜다. 부조리에 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이 가짜라는 것. 방탈출에 몰입하는 내 연기가 가짜고 부조리에 몰입하는 내 마음이 가짜다. 그럼 진짜는 무엇인가. 크리스토프가 말해준다. '자넨 진짜야.' 설계자가 하는 말이라 미심쩍긴 하지만 그 말 자체는 사실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 그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것, 그것이 방탈출을 위해 머리를 굴리며 추리를 하는 일이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일이든 취업 스펙 쌓기를 위해 애쓰는 일이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일이든. 내가 지금 있는 공간과 시간만이 진짜다. 진짜에 집중하는 것만이 의미있는 일이라 가정한다면, 미로에서 탈출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의미 없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에 온 힘을 쏟는 것이 훨씬 값지다.
너가 진짜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나는 저 대사를 되짚으며 말해본다.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미로가 아닌 나 자신이라고. '출구 없는 미로'라는 메타포에 과몰입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이렇게 되뇌이고 나면 얇은 보호막이 내 몸을 감싸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 표시해주는 마카가 빨갛게 나를 칠한 듯. 그리고 힌트 찬스 전화기를 들어 설계자 크리스토프에게 이야기하는 상상을 한다. "미로를 완벽하게 잘 만드셨네요, 힌트는 필요 없습니다. 가짜 미로에서 탈출하려 애쓰는 일은 의미가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