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 튀는 줄만 알았는데, 묘하게 진지했어

by TamArt

엄재원 작가의 팝아트는 블록버스터 한 편을 다 보고 난 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도 마음이 계속 웃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월드 아트 페스타에서 만난 ‘유쾌한 위로’

코엑스 전시장 한가운데, 형광색에 가까운 노랑·핑크·민트 색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둥근 레진 오브제 위에 귀여운 동물과 캐릭터들이 가득하고, 그 위를 만화 말풍선 같은 텍스트가 빙 둘러싸고 있죠. 가까이 다가가 읽어보면 “GIVE IT A SHOT”, “YOU STILL MY NO.1” 같은 문장들이 장난스럽게 걸려 있습니다.

마치 미국 히어로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내뱉는 한 마디처럼, 가벼운 농담이지만 그 안에 ‘버티고 나아가자’는 다짐이 숨어 있습니다. 작품 전체를 감싸는 톤도 그렇습니다. 형광펜으로 끄적인 듯한 선, 별 모양과 낙서들이 가득한 배경,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캐릭터들 덕분에 화면은 온통 장난과 유머로 가득 차 있지만, 그 한가운데에 있는 표정들은 묘하게 진지합니다. 그래서 더 미국식 유머 같아요.

상황은 심각한데, 농담을 던지는 순간 분위기가 통째로 뒤집히는 그 맛. “It’s nothing”이라고 말해주는 슈퍼히어로의 한마디처럼, 엄재원 작가의 문장도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별 거 아니야, 다시 가보자.” 기억과 감정을 팝아트로 번역하는 방법 엄재원 작가는 원래부터 캔버스 대신 아크릴, 레진으로 만든 오브제, 알루미늄 판을 즐겨 사용해 온 작가입니다.

평면 위에 그리는 대신, 작은 프레임 조각들을 켜켜이 쌓아 하나의 입체적인 화면을 만드는 방식이 특징인데, 월드 아트 페스타 작품에서도 이 입체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동그란 오브제들이 벽에서 톡 튀어나와 있고, 그 위에 또 작은 레이어들이 겹쳐져 있어서, 앞에서 보고 옆에서 보며 천천히 둘러보는 맛이 있습니다.


작가의 작업 주제는 ‘기억’과 ‘추억’입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 그리움, 익숙한 장면들을 형태를 쪼개고 파편화해서 다시 조합합니다. 그래서 화면에는 익숙한 듯 낯선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에 봤던 애니메이션, 오래된 비디오게임 화면, 동화책의 조각 같은 것들이 한 화면 안에서 뒤섞여 있죠. 그런데 그 추억의 이미지에, 밝고 통통 튀는 색감과 팝아트적 유머가 더해지면서, 과거의 감정이 ‘우울한 회상’이 아닌 ‘유쾌한 에너지’로 변환됩니다.


관람객 입장에서도 이 구조가 흥미롭습니다. 처음엔 “귀엽다, 재밌다” 하고 웃게 되지만, 곧 그 안에서 나 자신의 기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만 알고 있는 힘들었던 시기,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인생의 순간들, 그럼에도 어떻게든 넘겨버린 날들을 떠올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 있게 됩니다. 엄재원 작가가 파편화한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혹독해도, 농담은 우리 편이다” 당신이 쓴 글에서, 미국식 블록버스터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극한의 긴장감 속에서도 웃음을 던지는 히어로의 순간, 바로 그 장면이 엄재원 작품과 딱 연결됩니다. 월드 아트 페스타에 걸린 그의 작업은 현실의 무게를 모르는 척하지 않습니다. 알록달록한 화면 속 텍스트는 오히려 그 무게를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TRY AGAIN”, “IT’S OKAY”, “YOU STILL MY NO.1” 같은 문장은 실패와 상처를 전제로 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문장들은 밝은 색과 귀여운 캐릭터 입을 빌려 말해지기에, 우리에게 상처보다 용기를 먼저 건넵니다. 현실이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무력감에 빠집니다. 하지만 엄재원 작가의 팝아트는 다른 태도를 제안합니다. 슬픔과 우울을 완전히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 위로 과감하게 낙서를 덧칠해 버리는 태도입니다. 실패한 하루 위에 형광펜으로 “It’s nothing”이라고 크게 써버리는 것. 그 장난스러운 제스처가, 이상하게도 다시 걸을 힘을 줍니다. 이게 바로 팝아트가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위로 아닐까요.


나만의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관람기 전시장을 나오는 길, 당신이 떠올린 히어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 역시 머릿속에서 자막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Life is tough, but we are fun.” 월드 아트 페스타의 북적이는 공기, 수많은 작품 사이에서 엄재원 작가의 팝아트는 유난히도 ‘재밌는 사람’ 같았습니다. 자기 삶의 고단함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농담을 놓지 않는 사람 말이죠. 그래서 이 전시는 단순히 귀여운 그림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 내 삶에 붙일 수 있는 새로운 말풍선을 하나 얻어 가는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하루가 뜻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직 농담을 할 힘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외쳐볼까요. “It’s nothing.” 그리고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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