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고릴라한테 심쿵한 날

앤서니 브라운전

by TamArt

전시회 앞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잘못 왔는가 싶다.
아이들을 이끌고 온 도슨트 선생님조차도 아이에게 질문을 던지며 친근하게 설명을 해주신다.
아이 그림책 작가 전시라고 해서 가볍게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이자 영국 아동 문학계의 거장이라 하지 않는가.


그가 2000년에 ‘그림책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받은 최초의 영국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아이들 틈에 끼어 있는 어른 관객인 나 자신이 조금 덜 어색해졌다.

거대한 고릴라 작품이 처음 맞이한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잘 왔다 싶다. 장난스런 표정과 인간의 10배는 되는 규모의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에게 고릴라는 트레이드마크 같은 존재라고 한다.

작가 자신이 “고릴라의 거대한 힘과 동시에 느껴지는 상냥함이 늘 매혹적이었다”고 말했듯, 그 이중성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처럼 느껴진다.


고릴라와 미녀가 나오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건 그 상징과 감정을 한 번 더 곱씹게 해주는 실사화라고 해도 좋겠다. 작품으로서도 그 규모로 압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고릴라를 모티브로 다양한 스토리형 그림을 그렸다.대표작 『고릴라(Gorilla)』에서 고릴라는 소녀를 데리고 동물원, 영화관, 식당을 누비며 마치 아버지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준다. 알고 보면 그 고릴라는 소녀의 아버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거친 듯하지만 사실은 다정한 마음을 품고 있는 어른의 초상 같다.


고릴라는 그냥 우리네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의 패션, 라이프스타일, 감정을 모두 가지고 갔다.
정장을 입은 고릴라, 안경을 쓴 침팬지, 외로워 보이는 원숭이들은 그저 웃긴 캐릭터가 아니라, 어른들의 고독과 권태, 아이들의 두려움과 상상을 빌려 보여주는 또 다른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의인화는 아이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스토리가 아닌가.

앤서니 브라운은 고릴라와 침팬지, 곰 같은 동물들에게 인간의 표정과 감정을 입혀, 아이들이 스스로의 감정을 안전하게 들여다보게 돕는다고 한다. 외로움, 질투, 두려움, 부모와의 관계처럼 어른도 피하고 싶은 감정들까지 슬며시 동물의 얼굴 뒤에 숨겨 놓고, 아이들이 그림 속에서 조금씩 꺼내 보도록 이끈다.

앤서니 브라운전 그림책 속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즐겁게 관람을 마칠 수 있다.


『고릴라』, 『우리 아빠(My Dad)』, 『우리 엄마(My Mum)』, 『숲 속으로(Into the Forest)』 같은 대표작들을 통해, 가족과 상실, 상상력과 성장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얼마나 다정한 그림으로 건네질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텍스트는 적지만, 배경 구석구석 숨겨진 상징과 장난스러운 유머 덕분에 한 장면을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이 그의 그림책의 힘이라 한다. 이렇게 <혜자>와 같은 전시가 또 있을까. 언제 끝날까 싶을 정도로 작품이 많다.

작가가 지금까지 40권이 넘는 그림책을 쓰고 그렸다고 하니, 전시장 벽이 빼곡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국에서 ‘어린이 문학계의 대사’ 같은 역할을 하는 ‘칠드런스 로리에이트(Children’s Laureate)’를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맡았다는 이력도, 이 방대한 작업량 뒤에 있는 시간과 책임감을 짐작하게 해준다.


넓직한 전시홀 가운데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다.
1시간 반을 집중하며 걷고 감상하다 보니, 그리고 전시홀 내에 에어컨 바람 때문에 추워서
마지막을 휘리릭, 거의 책장을 후루룩 넘기듯 보다 나왔다.


전시 기획자 분은 홀 내에 잠시 앉아서 다리도 쉬고 감상도 할 공간과
여름에는 에어컨 온도를 너무 세게 틀지 않았으면 한다.


전시회를 다 보고 나니 ‘아차’ 싶다.
예술 작품에서 어른 전시, 아이 전시는 없다는 것을.


앤서니 브라운은 늘 “아이들은 온갖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고, 오히려 어른들이 그 어둠을 더 두려워한다”고 말한다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책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깊이 파고드는 구석이 있다.


'앤서니 브라운전'을 다 보고 나니 ‘아차’ 싶다.

예술 작품에서 어른을 위한 전시, 아이를 위한 전시는 별도로 없다는 것을 깨닫았다.

아이 그림책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져 있던 어른들의 이야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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