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빛과 꿈
비가 내리는 날에는 가지 말았어야 했다. 전날 밤부터 목이 칼칼했고, 몸은 미열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약 한 알을 삼키고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전시 마감 이틀 전이었다. 오늘 가지 않으면 영영 못 본다.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됐다.
알폰스 무하. 이름부터가 어딘가 낯설고, 묘하게 달콤한.
그때까지 나는 그를 단순히 "포스터 잘 그리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아르누보니, 상업 예술이니 하는 말들이 머릿속에 흐릿하게 걸려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뿐이었다. 광고판을 예쁘게 그린 사람. 19세기 파리의 유행을 만든 사람. 그 정도. 나는 틀렸다. 완전히, 그리고 다행히도.
전시장 첫 번째 섹션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멈춰 섰다.
포스터 한 장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내려다보는 것도 올려다보는 것도 아닌, 눈높이에서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스몽다(Gismonda)」. 1894년 크리스마스 무렵,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우연히 남겨진 무명의 화가에게 급하게 떨어진 의뢰.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위한 연극 포스터.
높이가 약 216센티미터. 거의 사람 키다.
당시 파리 거리의 광고 포스터들은 작고 요란했다. 멀리서도 눈에 띄어야 했으므로 원색을 질러대듯 썼고, 크기는 작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흘끗 보거나, 아예 보지 않았을 거다. 시선이 피로해진 군중은 포스터 앞을 지나면서도 눈을 다른 곳에 두었다.
그런데 무하의 포스터는 달랐다.
길 가던 사람이 문득 멈추는 걸 상상해 보라. 원색의 소음 속에서 갑자기, 파스텔 톤의 고요함이 나타난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키의 여인이 눈높이에서 조용히 서 있고, 머리 위로는 꽃이 피어 있으며, 발밑으로는 선이 물처럼 흐른다. 피곤한 눈이 편안해지고, 낯선 친밀감이 스며든다. 미술관이 아닌 거리에서, 처음으로 한 장의 그림을 만난 느낌.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사실, 포스터 속 여인이 무엇을 입고 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비율이, 그 크기가, 그 고요한 파스텔의 온도가 – 내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다는 것만은 선명히 기억한다.
아, 이 사람이 그냥 포스터 작가가 아니구나.
무하의 삶을 알면, 그의 그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프라하 미대 입시에 떨어졌다. 고등학교에서는 성적 불량으로 퇴학을 당했다. 오랫동안 지방 극장의 무대 배경이나 그리며 생계를 이어갔다. 찬란한 출발 같은 건 없었다. 그가 파리 거리를 뒤흔든 포스터를 그린 건 서른넷. 수없이 거절당한 뒤, 마침 자리에 있었던 덕분에,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였다.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무하의 삶도 그렇다. 멀리서 보면 화려한 세계적 예술가의 서사다. 가까이서 보면 – 번번이 거절당하고, 지병에 시달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서 조국을 잃고, 결국 나치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다가 건강이 무너져 세상을 떠난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는 평생 "보잘것없음"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전시 제목이 이렇게 가슴을 파고드는지도 모른다. 알폰스 무하: 빛과 꿈.
두 번째 울컥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왔다.
「슬라브 서사(The Slav Epic)」 연작 앞에서였다. 20점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화. 체코, 폴란드, 러시아, 세르비아 – 오랫동안 억압받아 온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담은 그림들. 전쟁이 있고, 탄압이 있고, 어둠이 있다. 그런데 무하는 그 어둠을 그리면서 반드시 무언가를 함께 그려 넣었다. 빛.
화면 끝 어딘가에서 스며드는 작지만 또렷한 빛. 혹은 어린아이. 혹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손. 그림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는 출구를 닫지 않았다. 마지막 연작에서는 서로 다른 슬라브 민족의 남녀가 손을 맞잡고 춤추고, 그 위로 새로운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 빛 속에 서 있다.
이건 체코만을 위한 그림이 아니다. 억압받는 모든 사람을 향한 말이다. 어둠이 끝나면 반드시 빛이 온다. 희망을 놓지 마라. 나는 그 앞에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어둠을 살았기에, 이렇게 집요하게 빛을 그려 넣었을까. 어쩌면 그에게 그림이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였는지도 모른다.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말. 괜찮아. 여기서 끝이 아니야.
세 번째는 청동상 앞에서였다.
「자연의 여신」. 나는 사실 조각상 앞에서 감동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어릴 때 미술 입시를 준비하며 석고상을 수없이 들여다봤지만, 그것들은 내게 언제나 차갑고 무표정한 물체였다. 감동이 아니라 소묘 연습의 도구였다. 그런데 이건 달랐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여인이 거기 서 있었다. 몸의 곡선과 옷의 주름, 머리카락의 흐름이 모두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끊기지 않는 선. 자연처럼. 강물처럼. 마치 그녀가 그냥 존재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자라난 것처럼. 무하에게 여성은 장식이 아니었다. 그는 여성을 자연과 한 몸인 존재로, 민족과 역사를 품은 어머니로 형상화했다. 그래서 그의 여성상은 아름다우면서도 가볍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공허하지 않다. 그 안에 단단한 무언가가 있다. 나는 한참을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볼 수 있을까.
네 번째는 작은 것에서 왔다.
전시 한편에 놓인 박사학위증이었다. 당대의 국가 지도자에게 수여된 것이었고, 그 문양을 무하가 디자인했다. 금빛 테두리와 섬세한 장식 문양들. 나는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느닷없이 코끝이 시큰해졌다. 별 게 아니었다. 그냥 문서 장식이었다. 그런데 왜 울컥했을까. 나는 안다. 그건 문양 때문이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의 이름이 저런 것 위에 새겨진다면"이라는 상상 때문이었다. 내 존재가 그만큼 기념될 만한 것이라면, 내 삶이 저런 영광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면 – 그 오래된 갈망이 문양 하나에 건드려진 것이었다.
무하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 국가로 탄생했을 때, 우표를 디자인하고, 화폐를 디자인하고, 정부 문서의 문양을 디자인했다. 보수도 거의 받지 않고. 그에게 그것은 단지 디자인이 아니었다. 작은 나라가 세계를 향해 말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여기 있다. 우리에게는 역사가 있고, 품격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보잘것없다고 여겨진 것들이, 영광의 언어를 입는 순간.
나는 무하가 돈키호테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상주의자였다. 슬라브 민족의 해방을 꿈꾸며 20점의 거대한 역사화를 18년에 걸쳐 그렸다. 그 그림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그렸다.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포스터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고, 시장의 언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면서도 끝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1939년, 나치 독일이 체코를 점령했다. 무하는 체포됐고, 심문을 받았다. 그의 그림들과 그의 프리메이슨 활동이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그는 곧 석방됐지만, 건강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그해 여름, 그는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의 화려한 커리어 뒤에, 이런 이야기가 조용히 겹쳐져 있다. 나는 전시장을 나오며 비를 맞았다.
약 기운이 돌고 있었고, 몸은 여전히 나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따뜻했다. 울컥하는 것은 감정의 사치가 아니다. 그건 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언가가, 바깥에서 온 무언가와 정확히 맞닿는 순간의 반응이다.
무하의 그림이 나를 울컥하게 만든 건, 내가 특별히 예민한 관람객이어서가 아니다. 이미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빛과 영광을 갈망하는 마음.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붙들고 싶은 마음. 보잘것없는 존재도 아름다운 언어로 기념받고 싶다는, 조용하고 오래된 욕망.
무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비 오는 날 약 한 알 먹고 들어온 한 관람객의 눈을 촉촉하게 만든다.
보잘것없는 그대에게, 빛과 영광을. 무하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가 평생 자신에게 속삭인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게 좋다. 그래서 더 울컥한다.
전시 「알폰스 무하 : 빛과 꿈 」에서, 보물 11점을 포함한 작품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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