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엔, 느닷없이 김창열이 떠오른다.
후드득. 옷이 젖을 정도로 쏟아지는 이런 날, 왜인지 그의 물방울이 스치고 지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그를 만난 건 눈부시게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창덕궁 앞, 고즈넉함과 사람들의 수다가 뒤섞인 거리. 발걸음이 향한 곳은 현대미술관, 이유는 단 하나. 물방울을 보고 싶어서.
1970년대 파리, 밤새 그림을 그리던 그는 캔버스 위 물방울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을 목격했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른 것—6·25 전쟁, 동창 절반의 죽음, 총알에 뚫린 살갗의 기억. 물방울의 뿌리는 그렇게, 총알구멍에서 자랐다. 파리에서 홀로 작품을 이어가던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럼에도 그 시간들이 사뭇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건, 외로움이 깊을수록 작품도 깊어진다는 걸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그는 평생 딱 하나만 그렸다.
나는 그 앞에서 유학 시절이 떠올랐다. 한국 친구들과도, 현지인들과도 온전히 섞이지 못한 채 공부에만 매달리던 날들. 샤워 후 욕실에 맺힌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평범한 시간. 그가 빛과 그림자, 투명도까지 계산해 그려낸 영롱함은 나의 그 보잘것없는 순간을 예술로 건져 올렸다. 마포, 한지 같은 거친 재질 위의 물방울. 한자와 색점과 뒤섞인 물방울. 단순한 이미지를 아득히 넘어선, 그 물방울.
50년 가까이 한 사물만 들여다본 사람의 힘. AI가 초속으로 이미지를 뱉어내는 이 시대에 그 집요함은 더 빛난다. 그에게 물방울은 수행이었다. 분노, 불안, 공포를 녹여 '무(無)'로 돌려보내는 일. 수많은 반복 속 찬란한 슬픔. 그게 비 오는 날, 가슴으로 스며드는 거다.
김창열. 너무 감사한 작가다.
보통날의 미술관, 진짜 감상을 기록합니다. 당신의 하루에 평온함이 깃들길 바라며— 구독하면 매번 데려다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