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활을 시작하기 전엔 몰랐다.
원하는 것 10~20%를 얻으려면 동시에 70~80%의 귀찮고 싫은 것들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서 모인 친구들, 매일 마주치는 새로운 문화, 수재들과의 대화. 그 '핑크빛' 장면을 얻기 위해,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상으로 채워졌다. 그 속에서 오후 2시, 3시는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아침의 상쾌한 시작도, 노을의 드라마틱한 순간도 아닌, 특별한 이름을 붙이기 애매한 시간대. 나는 그 나른한 오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기억에 남을 장면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별거 아닌 시간"이라고 속으로 분류해 버렸다. 그 시선을 바꿔준 사람이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었다.
그녀는 흐린 도시에서 자랐다. 드물게 비집고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유난히 귀했던 어린 시절. 그 경험이 이후 그녀의 작품 전체를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빛이 그녀에게는 영원히 붙잡고 싶은 장면이었을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마치 색채 연구실에 들어온 것 같았다. 튜브에서 막 짜낸 듯한 습작들부터, 커튼 사이로 바다가 펼쳐지는 완성작까지. 그녀의 그림 앞에 서면 처음엔 '그냥 커튼이네, 그냥 바다네' 싶다. 그런데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뭔가가 살며시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하이퍼리얼리즘 화풍 효과로 모든 것이 현실 창문처럼 느껴졌다.
강한 명암 대비가 없다. 대신 아주 미세한 톤의 변화로 빛이 공기 속에 엷게 번지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커튼과 벽, 수면 위에 부드러운 그러데이션을 반복적으로 덧칠해, 빛이 그림 안에 실제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물결 위의 반짝임은 작은 점과 짧은 붓질을 겹겹이 찍어, 사진처럼 또렷하면서도 약간 흔들리는, 딱 그 찰나를 잡아낸다. 빛은 그림 안에서 머물지 않는다. 지나가고 있다.
그녀의 그림에서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느껴진다.
얇은 거즈 커튼이 살짝 비틀리고 부풀어 오르는 곡선. 커튼 위에 드리운 그림자가 바람 따라 모양을 바꾸는 순간. 창틀과 난간은 단단한 직선으로, 커튼과 물결은 부드러운 곡선과 리듬감 있는 붓질로 처리해, 정지된 공간 속을 통과하는 바람을 시각화한다.
그림 뒤편에 실제 커튼을 설치해 두어, 작품 앞에 서면 현실의 커튼과 그림 속 커튼이 겹쳐 보이도록 연출해 두었다.
파도 소리와 잔잔한 사운드까지 더해지자, 그림 속 오후 3시쯤의 공기가 피부에 그대로 와 닿는 것 같았다. 작품을 감상하는 한동안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잊었다.
그제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동안 오후 2시에서 4시까지의 시간을 그렇게 싫어했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 시간을 의미 없는 구간이라고 단정해버렸을까.
브라운은 그 흐릿하고 나른한 오후를 평생 그렸다. 강렬한 한낮도, 드라마틱한 노을도 아닌, 하루의 가운데를 어정쩡하게 가로지르는 그 시간을. 바다에는 푸른 계열을 여러 층으로 얇게 깔고, 그 위에 노란빛과 분홍빛을 얹어 만든 오후의 공기색. 그 색이 커튼에 살짝 스며들어, 공간 전체에 같은 공기가 흐르는 느낌을 만든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영원히 붙잡고 싶은 장면이었을 것이다.
별다를 것 없던 오후의 교실, 졸음과 싸우며 문제집을 들여다보던 시간들 속에도, 창문 틈으로 스며들던 빛과 살짝 흔들리던 나뭇잎의 그림자가 있었을 것이다.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마음먹었다. 누구나 기억할 만한 하이라이트 대신, 그저 지나가는 줄만 알았던 오후 2시에서 4시까지의 나른한 시간까지 사랑해 보기로.
특별하지 않은 시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결국 자기 삶 전체를 사랑할 수 있다.
브라운의 그림 속 창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시간들이야말로 삶이 조용히 숨 쉬는 순간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빛은 극적인 순간에만 오지 않는다. 오후 3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시간에도 빛은 어김없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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