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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Apr 30. 2018

아직 끝난 것 같지 않은 기분

잃어버린 내 안의 열정을 찾아서

 EP1

아직 끝난 것 같지 않은 기분

잃어버린 내 안의 열정을 찾아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피곤하다.
무엇을 먹든 상관이 없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잘 모르겠다.
자주 피곤하고, 자주 한 숨을 쉰다.
뭘 했는지 모르게 하루가 지나가 있다.
젊음이나 열정 같은 게 더이상 나를 위한 단어가 아닌 것 같다.
뭘 해도 재미가 없다.
도전을 꿈꾸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행복해지기보다 불행해지지만 않았으면 싶다.
식욕이든 성욕이든, 도무지 욕구라는 게 없다.

위 사항 중 세 가지 이상 체크를 하셨다면 우울증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따위의 글이 아니다. 우습지만 이건 나의 상태다. 세 가지를 체크할 것도 없다. 모든 상태에 내 모습이 해당되니까.

지난밤에 밤잠을 설치다 눈을 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 같은 이유라면 차라리 다행이었겠다. 불안함도 느끼지 않는 제자신의 공허함이 새벽 공기를 타고 두 뺨 위를 스쳤던 것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간극이랄까, 차라리 그런 과거 내 모습에 대한 향수나 지금 내 모습에 한심함이라도 느끼면 좋겠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마치 이번 인생이 세 번째인 사람인 것처럼.
눈 앞에 놓인 음식 맛이 궁금하지 않다. 새로 만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읽고 싶은 책도, 보고 싶은 영화도 없다. 내일 무슨 일을 할지, 내 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져 있을지 눈에 훤히 보인다. 엔딩을 아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다. 지루하다. 재미없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이런 염세적인 생각들. 확실히 군대는 이런 생각을 가지게 하는 데 상당 부분 일조했다. 군대에서의 2년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았던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그 2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그곳에서도 지금처럼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시간을 보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곳에 대한 기억이 없다. 분명 좋았던 점도 있겠지만, 그 공간과 환경이 나에게서 무언가를 지워버렸단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강렬한 자극을 받기 위해 무작정 치앙마이로 떠났다. 처음엔 새로운 환경에 에너지가 생겨나는 듯했으나 결국 치앙마이 한 달이 내게 준 것은 까맣게 그을린 피부뿐이었다. 귀국 후에는 학교에서 공연을 하나 올렸다. 공연은 늘 내게 새로운 자극을 줬으니 분명 여기서 받는 에너지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연도 마찬가지 었다. 뻔하고 뻔했다. 나는 이미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아는 대로, 가지고 있는 대로 내가 알고 있는 그림만 그려냈다. 스스로가 너무 재미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예측 가능한 내 인생이, 내 모습이 시시해졌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 미친 듯이 준비 해 올린 공연이 끝났을 때. 설마 가능할까 싶은 방식으로 쏘다니던 여행이 끝나고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때. 불이 꺼진 극장에서 내 심장을 때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던 때. 분명 그런 때가 있었다. 내게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 그리고 그 느낌이 끝나지 않고 영원하길 간절히 바라던 순간이 분명 있었다. 그 순간을 되찾고 싶다. 무언가에 뜨겁게 미쳐보는, 끝이 나고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그런 순간.
이제부터 적게 될 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을 찾기 위한 이야기들이다. 그것이 무대든, 그림이든, 사람이든, 하물며 오늘 저녁에 먹은 음식이나 관람한 영화든.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의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쏟을 수 있는 있는 일이라면 뭐든 적어볼 생각이다.
모든 일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운동을 하는 데도,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데도, 공부를 하는데도, 밥을 먹는데도, 사람을 만나는 데, 가족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데, 하물며 이 글을 읽는데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의 경우, 그것을 하는 데 아마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한 사람일 것이다(브런치에 이렇게 오랜만에 글을 적게 된 것만 봐도 알 것 같지 않은가). 더욱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매주 이곳에 글을 적는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할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보기로 했다는 건, 아직 내 삶을 포기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끌어올리고 싶다. 새로운 음식 맛을 느껴보고 싶다. 사진 속의 그 장소에 찾아가고 싶다. 그 사람과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다. 보고 싶은 책이, 기대되는 영화가 많아지고 싶다. 내일이 기다려지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

이 기록들이 내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적어도 우선 확신하는 건,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음이 기대된다. 일단 이것으로 나는 변화했다. 부디 이 변화가 순간의 섬광이 아니길 바라본다. 아니, 일단은 섬광도 괜찮다. 지금은 섬광 같을지언정 이 순간의 빛들이 모여 태양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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