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un May 07. 2018

설거지가 네게 평화를 부를 거야

집안일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

EP2

설거지가 네게 평화를 부를 거야

집안일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


빨래를 다시 돌렸다. 전날 밤에 돌린 빨래를 깜빡하고 꺼내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대로 꺼내기 찝찝해서 빨래를 다시 하기로 했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고 'on' 버튼을 눌렀다. 싱크대 위에는 설거지가 쌓여있었다. 빨래를 돌린 김에 설거지도 해야겠다 싶어 설거지를 했다.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묻혀 거품을 내어 접시와 컵, 숟가락과 젓가락 따위를 씻어냈다. 음식물쓰레기는 봉투에 넣어 깨끗하게 처리하고, 여기저기 튀어버린 물기를 닦아내는 것으로 설거지를 마쳤다. 설거지를 한 김에 며칠간 치우지 않아 더러워진 방도 청소하기로 했다. 돌돌이 테이프로 바닥에 쌓인 먼지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책상 위에 정신없이 널브러진 이면지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아직까지 개지 않은 건조대의 빨래들을 거둬 수납함에 차곡차곡 쌓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입고 있던 옷을 빨래통에 벗어던지는 것으로 방 청소도 끝. 이렇게 된 김에 샤워도 해야겠다 싶었다. 미세 먼지로 뒤덮였을 얼굴을 클렌징 오일로 닦아내고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몸의 물기를 닦아낸 뒤 얼굴에 스킨,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렸다. 새로 산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속으로 골인. 평화가 느껴졌다. 하하. 어젯밤에 깜빡하고 꺼내지 않은 빨래를 다시 돌렸을 뿐인데, 평화가 찾아왔다.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기껏해야 매일(해야)하는 집안일을 했을 뿐인데 우습게도 평화가 찾아온다. 근심, 걱정, 불안과 같은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 따뜻한 숨으로 온몸이 가득 차는.

집안일이 평화를 부른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만약 알고 있다면 너도 나도 집안일을 하려고 하겠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포함)들이 집안일을 귀찮아하는 것으로 봐선 이를 아는 사람은 몇 되는 것 같지 않다. 아니면 알고는 있으나 정말 손 하나 까딱하기 귀찮을 정도로 움직이기가 싫은 상태이거나. 나는 후자였다. 안 그래도 너무 피곤한 하루인데 집에 와서 집안일까지 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쌓여있는 빨래와 설거지는 보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다. 그러니 외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상태의 나는 집에 오자마자 눕는 쪽을 택했다(가끔은 그 상태로 잠이 들었던 적도 있다). 세탁기 광고 속 배우들처럼 햇살이 내리쬐는 이른 아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빨래를 한다면야 누군들 행복하지 않겠는가. 빨래를 하기도 전에 이미 평화로운데. 집안일이 가져오는 평화는 잘 알고 있지만, 이게 현실과 부딪히게 되면 평화는 부담이며 사치가 된다. 그래서 포기한다. 집에 와서 바로 누워버리는 나처럼. 차라리 몸이 녹아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오면 적어도 10분에서 15분간은 눕지 않는 나만의 법칙을 만들었다. 나는 이것을 '15분 룰'이라고 하는데, 집에 돌아온 순간부터 15분간은 뭐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이게 생각보다 굉장히 힘들다. 자석처럼 몸이 침대 쪽으로 끌려간다). 뭐든 일단 손에 잡히는 걸 하기 시작하면 다음 일들로 이어진다. 시작은 빨래였지만 결국 샤워를 하고 잘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처럼. 시작이 어렵다는 말, 많이들 하지 않는가. 집안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단 시작하면 너무도 단순한 일들이지만 그걸 '일단 시작'하는 게 힘드니까.

그러나 가끔은 빨래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시작하기 매우 쉬울 때도 있다. 공허함을 견디기 힘들 때, 화를 이길 수 없을 때, 슬픔을 지울 수 없을 때가 그렇다. 가수 이적은 <빨래>라는 노래에서 헤어진 연인을 잊고 싶어 빨래라도 해야겠다고 이야기한다. 뮤지컬 <빨래>에선 '뭘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슬플 땐 빨래를 한다'고 노래한다. 공허함을 견디기 힘들 때, 이길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거나 슬플 때 빨래를 한다는 얘기다. 왜냐. 평화가 오니까.

빨래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은 평화를 부른다. 더러워진 때를 내 손으로 하나하나 닦아내고, 물로 씻겨내고 있으면 나를 괴롭히는 직장 상사의 얼굴이나 헤어진 연인과의 아픈 기억 따위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옷을 빨고 접시만 닦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저 자신도 씻겨내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접시가 깨끗해진다고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될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당장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생각이 너무 많아 죽겠거나 피곤해 죽겠어도 일단 설거지를 하자. 빨래를 하자. 방 청소를 하자. 나비의 날개짓이 지구 반대편에선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별 거 아닌 설거지가 내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지 모르는 일이다. 변화가 없다 해도 한 가지는 확신한다. 접시가 깨끗해질 것이다.


-

instagram.com/bpmbear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 끝난 것 같지 않은 기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