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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un 29. 2020

그냥 여행이 망한 여행이 되기까지

prologue : 이토록 무력한 계획이라니

 지난주에 비행기 표를 샀다. 프랑스의 니스로 시작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경유지인 터키로 마무리하는 약 한 달간의 일정으로.


 ‘비행기 표를 샀다’라는 말은 뭔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만 같다. 가방을 샀다, 노트북을 샀다, 옷을 샀다, 와 같은 말에서 읽히는 심리와는 확실히 다른 독특한 구석이 있다. 비행기 표를 산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이 문장에 담긴 의미가 달리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한 소비욕 때문만 이라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러기엔 '비행기 표'가 가진 의미가 심상치 않다.

 비행기 표. 누군가에겐 휴식, 누군가에겐 도피, 누군가에겐 일, 누군가에겐 설렘과 두려움을, 또 누군가에겐 지루함을. 비행기 표에 담긴 상징이 확실히 평범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나는 비행기 표를 그냥 샀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토핑을 골라 주문하듯 인, 아웃 도시와 경유지를 정하고는 그렇게 만들어진 비행기 표를 구입했다.

 확실히 여행은 내게 그런 존재가 되었다. 길을 걷다 배가 고프면 주문하는 샌드위치와 같은. 마침 지난주의 나는 배가 많이 고팠고, 맛있어 보이는 비행기 표를 주문했다. 이제 남은 것은 주문한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 일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2020년 7월 말, 니스로 떠난다. 이 여행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냥 여행’이다. 세워놓은 계획이라곤 확정된 비행기 좌석 하나 뿐.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일단 저지르면 뭐든 되었던 것이 지난 나의 여행이었으니까.


 한 달 뒤, ‘그냥 여행’이 취소되었다. 이유에 대한 별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해로 기억될 한해일 텐데.


 2019년 12월 말, 중국 우한으로부터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됐다. 시작은 여느 유행 질병과 다름없이 그리 무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메르스, 사스, 신종 플루 까지 겪어봤다. 그렇기에 코로나 바이러스 또한 언젠가는 무탈하게 지나갈 줄 알았다. 물론 나의 ‘그냥 여행’과도 상관없는 얘기라 여겼다.


 일상은 빠르게 변했다. 마스크 착용이 권장에서 필수로 바뀌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의적인 방역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 방문 시 명부를 작성해야 했고,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 마저 어려워졌다. 술 약속을 잡았다 취소 했다를 반복하는 날이 잦아졌고, 주변 배우 친구들에게서 공연 취소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화상 채팅과 같은 비대면으로 소통하는 것이 더이상 낯설지 않아졌다. 계절이 바뀌었고, 사람들의 표정도 바뀌었다. 어느날 뉴스에서 어떤 아나운서가 나와 얘기하더라. ‘팬데믹’이라고.


 하늘길이 막힌 건 물론이오, 경제도, 생계도 심각하게 위협받는 혼돈의 세상. 그 세상이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냥 여행' 또한 자동으로 취소되었다. '그냥 여행'이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난 '망한 여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행을 취소하던 날, 나는 하루 종일 허파에 바람이 빠진 사람 마냥 허허 웃어댔다.

 계획이란 어쩜 세상 앞에 이리도 무력할 수 있을까. 멋들어진 계획에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란 건 진작 알았는데, 비행기 표를 구입했을 뿐인 이런 하찮은 계획도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간 내가 경험한 '흘러가는 대로'는 적어도 내 선택의 방향이었다. 이를테면 비행기 티켓을 구입했다면 비행기를 탈 수는 있어야 한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적어놓고도 웃기다. 그런데 이제는 비행기 티켓이 있어도 비행기를 탈 수 없다. 그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세상. 그런 것을 두고 흔히 망했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세상이 망해버렸나 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순식간에 망해버렸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세상이 망했다는 게 정말 사실이라면 적잖이 절망적이다. 

 나는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을 두고 '망했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사전적인 의미의 '망했다'보다는 조금 순화된 '엉망진창'정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엔 잘 모르겠다. 엉망진창 정도가 아니다. 실수로 빠져 버린 나사 하나 때문에 세상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려앉은 것만 같다.

 과연 다시 여행이란 걸 떠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아니, 이전과 같은 일상이라도 되찾을 수는 있는 걸까. 마스크 없는 일상, 가족과 친구들과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근황을 묻던 모임,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났던 가슴 뛰는 여행, 그 모든 것들이 영영 과거의 것이, 추억의 영역이 되어 버린다면.


 스물 셋에 600만원으로 두 달간 유럽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비행기 값 포함이다.


 출발하는 날, 비행기를 놓쳤다. 학생 특가였던 바람에 환불도 받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새로 티켓을 구입했다. 그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결국 600만원이라는 적은 예산 안에 130만원 이라는 작지 않은 구멍까지 뚫렸다. 기존에 구입했던 티켓 값마저 제외하면 남은 돈은 350만원 정도. 물가 비싼 유럽에서 350만원으로 두 달간 여행이라니. 그야말로 출발부터 ‘망한’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여행을 시작하는 도시인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악몽을 꿨다. 남아있는 350만원 마저 몽땅 잃어버리는 꿈부터 기내에 몰래 타고 있던 테러범이 비행기를 폭파 시켜버리는 꿈 까지. 그 해 꿀 수 있는 악몽은 그날 몰아서 다 꿨던 것 같다. 이러려고 그 고생을 하며 여행비를 번 게 아닌데. 군대에 끌려가는 것도 그것보단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낀 여행은 그 과정도 순탄할 리 없었다. 세워놨던 계획은 당연히 모두 무너졌다. 오늘 하루 몸 뉘일 곳을 찾는 것으로 혈안이 된, 생존 여행이었다.

 여행 경험이라곤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갔던 제주도와 어학연수로 한 달간 머물렀던 도쿄가 전부. 이렇게 먼 곳으로 온 첫 장기 여행 치고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싶었다.


 그런데 참 재밌게도 되긴 되더라. 나를 재워주는 곳이 있었고, 아쉽지 않게 배를 채웠다. 여행 막바지엔 심지어 포동포동 살이 쪘다. 꼭 가고 싶었던 곳, 보고 싶었던 곳들도 보았다. 좋은 친구들도 사귀었고, 낭만과 여유를 느끼는 시간도 있었다. 그러니까, 여행이 되었다.

 물론 돈이 없어 포기한 것도 있었다. 매일 매일 뮤지컬을 보겠다며 호기롭게 8일을 계획했던 런던에선 결국 두 개의 뮤지컬 밖에 보지 못했다. 유명하다던 파리의 맛집 대신엔 크림치즈를 듬뿍 바른 바게트로 만족해야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부족한 예산에도 굳이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내 선택이었으니까.


 이 일련의 과정이 꼭 내가 사는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어진 것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던 나의 선택들이 모여 길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여행은 삶이구나.


 지난 여행 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는, 지금 상황이 이때의 기억과 참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속수무책으로 망해버린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간 오늘로 어제를 그려간다. 어떤 내일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르기에 걷는다. 여행처럼.


 그래서 적는다. 망했다는 건 잠시 주춤하는 것, 나쁜 상황을 통해 교훈을 얻어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인생이란 원래 이리도 쉽게 망하는 것이고, 그건 끝없는 추락이 아닌 도약하는 과정 일 거라는 거, 우리 모두 저마다의 삶을 거울삼아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은 없다. 오늘 아침에 보니 전날 먹으려고 아껴뒀던 케이크를 아버지가 다 드셨더라. 이처럼 나의 오늘도 한치 앞도 모르는데 여행이라고, 세상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이 거지같은 바이러스는 그 사실을 상기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흐름 앞에 나는 마냥 무력하고 싶지만은 않다. 생각해보면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큰 무언가를 배워왔다. 늘 그랬듯 나의 거울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가고 싶다.

 이것이 이 여행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지난 나의 망한 여행을 거울로 오늘을 살아갈 따뜻한 온기를 얻어가고 싶다. 이 여행기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그 온기가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바이러스로 뒤덮인 망亡한 세상, 그 세상이 정말 그토록 바랐던 망望한 세상이 될 수 있게 말이다.


 이 여행기가 세상에 나올 때 즈음엔, 여행이 가능한 세상이 와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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