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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Mar 23. 2021

이 밤 중에 왜 산속으로 가나요? (1)

여행에서 처음 느낀 생명의 위협

 니스에선 5일 동안 있었다. 히치 하이킹으로 도착한 첫날은 급하게 'Last minute couch'(라스트 미닛 카우치, 지낼 곳이 급하게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요청. 보통 72시간 전에 많이 이용한다.) 메시지를 보내 기적적으로 호스트를 구했다. 어두운 밤, 잔뜩 긴장한 채 호스트 데미안 집에 찾아가는 중에 개똥을 밟았고, 오늘 하루 쓸 수 있는 운은 히치 하이킹에 다 써 버린 건가 싶어 바보처럼 웃은 기억이 난다.

 다행히도 남은 4일간 지낼 곳은 모두 구해졌다. 호스트 중엔 사진 찍고 그림 그리는 멋진 예술가도 있었고, 초대를 해주고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하는 게임 마니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호스트 또한 있었다. 지금까진 아무리 망했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이번은 달랐다. 그 사람은 달랐다. 나는 처음으로 이 여행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니스에서는 제법 평범한 여행객처럼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용한 해변가에 누워 맥주 한 캔과 함께 음악을 들으며 일광욕을 했고,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벤치에 앉아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바다의 도시답게 끝내주는 날씨였고 덩달아 별 거 하지 않아도 괜히 즐거웠다. 밀렸던 사진들을 모아 SNS에 업로드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휴관일인지 모르고 찾아간 마티스 뮤지엄에서 투덜거리며 돌아오거나, 치즈 케이크인 줄 알고 시켰는데 치즈 플래터 세트가 나온다거나 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상황들도 종종 발생했으나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눈 부신 바다가 바로 코 앞에 있는 걸.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생각도 문제의 그 호스트를 만나기 전까지만 이었다.



 호스트의 이름은 Feck. 물론 가명이다. 특정 비속어와 스펠링이 비슷하다고 느꼈다면 잘 캐치했다. 그 의미로 붙여준 가명이 맞다. 무튼, Feck은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였다. 집은 니스에선 꽤 거리가 있는 망통이란 지역이었지만, 어차피 그때 즈음이면 니스는 볼 만큼 봤을 테고 망통과 더불어 모나코까지 보고 오면 좋겠다 싶던 참이라 일정상 오히려 더 잘됐다 싶었다.

 바에서 일을 하는 Feck은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일이 끝나니 그때까지 기다려달라 부탁했다. 별다른 선택권이 없던 나는 알았다는 답장을 보낸 뒤, Feck과 만날 장소와 가장 가까운 코인라커에 짐을 넣어두고 하루 종일 니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약속 장소에 낡은 붉은색 승용차를 끌고 나타난 Feck과 만났다. 190cm는 되어보이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의 젊은 청년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Feck은 내게 비쥬로 인사를 했고, 프랑스에 온 지 꽤 되었음에도 비쥬가 처음이라 어색했던 나는 약간 당황하면서도 이내 별생각 없이 그의 차에 올라탔다.

 차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아주 늦은 밤이었고 아직까지 Feck은 낯선 사람이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창 밖과 Feck을 계속해서 번갈아 쳐다보며 괜히 말을 걸었다. Feck은 아주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무례하거나 무심하지도 않은 태도로 나와 대화했다. 그러다 톨게이트 요금소에 도착했는데, Feck은 내가 본인의 차를 얻어 탔으니 톨비를 내야 한다며 돈을 요구했다. 어차피 본인 귀갓길인데, 내가 안 탔어도 본인이 지불했어야 할 돈일 텐데, 싶은 생각이 드는 한편 그의 묘한 논리가 꼭 틀리지만도 않은 것 같아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네줬다.

 도대체 집이 어디인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이미 니스로부터 한참 멀어졌고, 창 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칠흑 같은 어둠과 도로를 간간히 비추는 가로등뿐이었다. 차는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더니 이윽고 산을 깎아 만든 가파른 길을 오르고 있었다. 1m만 잘못 디뎌도 바로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위험한 길이었다. 가로등은 벌써 사라져 정말 완전한 어둠뿐이었다. Feck은 낡은 승용차의 상향등에 의지해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가파른 산속의 어둠을 뚫고 있었다. 그제야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이상할 게 전혀 없는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위험한 상황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 순간, Feck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상당한 높이의 언덕 위였다.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듯 뛰기 시작했다. 나를 어쩔 셈이지? 돈을 뜯어내려고 그러는 건가? 아니, 딱 봐도 돈 없어 보이잖아. 아님 나를 이 언덕에서 아래로 밀어버릴 작정인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뭔데?... 장기 털리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나 지방간 있는데. 지방간이 영어로 뭐지.

 "잠깐 내려봐. 모나코 야경 보고 가자."

 차를 세운 Feck이 말했다.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니 보석 같이 반짝이는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모나코의 전경이 보이는 장소였다. '아, 이 야경을 보여주려고 차를 세운 거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차에서 내려 언덕 아래로 펼쳐진 모나코의 야경을 구경했다.

 "저게 모나코의 전체 크기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라는 모나코는 내 시야에 한 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았지만, 그간 보았던 어느 도시의 야경보다 밝고 화려했다. 꼭 값비싼 작은 보석을 보는 듯했다. Feck이 아니면 볼 수 없었을 값진 풍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차 안에서 그를 의심했던 마음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언덕 위를 올라갔다. 중간에 야경을 보고 이동한 덕인지 전보다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몇 킬로 더 올라왔을까, 산속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주차된 차도 꽤 많았고, 불이 켜진 집들도 적지 않은 엄연한 하나의 마을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니. 신기하면서도 동시에 안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Feck이 이렇게 말했다.

 "캐리어에서 필요한 짐만 챙겨. 걸어서 좀 더 올라가야 하는데, 캐리어 들고 이동하기 힘들 거야."

 또다시 경계의 털을 곤두세웠다. 이 많고 많은 집 중에 또 어딜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는 거야? 게다가 캐리어를 못 들고 가는 곳일 정도면 얘는 대체 어디서 사는 거야? 그러나 세면도구와 속옷, 보조 배터리 정도를 챙겨 그의 뒤를 따라나서는 나는 말 잘 듣는 손님이었다. 그는 작은 손전등 하나를 챙겨 마을 구석의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진짜' 산속을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 속옷과 세면도구를 든 채 프랑스 망통의 어느 이름 모를 산속으로 등산하는 여행객은 아마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쪼리를 신고 있는 바람에 발은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결국 신고 있던 쪼리를 벗은 채 맨발로 Feck을 따라갔다. 5분쯤 지나자 별장 같은 게 보였다. 희미한 달빛에 비쳐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같은 집이었다.

 "다 왔다."

 Feck은 들고 있던 손전등을 집이 있는 방향으로 세워두고 집을 소개했다. 보다 선명한 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내가 직접 지은 별장이야."

 Feck은 집 안에서 작은 랜턴 같은 것을 들고 나와 전원 버튼을 눌렀다. 서서히 불이 들어왔다. 너무 밝지 않은 게, 꼭 달빛 같았다.

 "낮에 모아둔 태양열로 불을 킬 수 있어. 밝진 않아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물은 계곡에서 끌어와서 쓰고 있어. 모든 게 자연 안에서 해결돼."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가 지어놓은 산속의 별장으로 나를 초대했던 것이다. 어쩐지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솔라 에너지가 어쩌고, 별장이 어쩌고 하는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나 싶었다. 진짜 태양열로 불이 켜지고, 계곡물을 끌어다 쓴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이 오두막을 눈 앞에 두고 있으니 모든 의심이 거둬졌다.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묘한 흥분과 쾌감까지 일었다.

 하루 종일 니스 시내를 돌아다닌 바람에 온 몸이 끈적 거렸다. 샤워를 하고 싶다고 얘기하니 Feck은 샤워를 할 만큼 물이 충분하지 않다며 오늘은 세수만 하고 내일 아침에 마을의 본가로 내려가 샤워하라고 대답했다. 순간 본가가 가까이에 있으면 굳이 왜 여기까지 올라와야 했나 싶었지만 더 이상의 의심은 득 보다 실이 클 것 같아 금방 접어버렸다.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우리는 태양열 랜턴을 사이에 둔 채 테이블 앞에 앉아 카드 게임을 했다. Feck이 오늘 가게에서 챙겨왔다는 스파클링 와인 한 잔도 함께했다. 숲속에선 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달빛 아래 카드게임을 하는 이 모습이 제법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어느새 참을 수 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잠도 깰 겸 오줌을 누러 화장실로 향했다. 어둠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화장실이 어딘지 도통 모르겠어 잠깐 헤맸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작고 낡은 창고 같은 곳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세상에. 그곳엔 사냥용 엽총이 두 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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