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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슌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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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an 27. 2023

명절 잔소리 차단 방법

무사한 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으랴

 "올해는 좋은 소식 들을 수 있으려나?"
 "이렇게 무사한 것만으로도 좋은 소식이지.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어."


 얼마 전 설 연휴, 부모님께 새배를 드리고 돌아온 아빠의 질문에 맞받아친 나의 대답이다. 듣기 싫은 명절 잔소리를 내포한 듯한 '올해 좋은 소식 들을 수 있느냐'는 아빠의 질문에 가벼운 농담조로 되갚았을 뿐인데, 설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 나의 대답이 머릿속에 맴돈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맞는 얘기 아닌가. 모두가 건강한 모습으로 보고 싶은 때에 모여 얼굴 보며 음식을 나누는, 이토록 무사한 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으랴.


할아버지를 보내드린 절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밤. 핼러윈이 한창이던 이태원의 상흔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날은 할아버지 장례를 치른 지 일주일이 조금 넘은 때였다. 공기 중에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떠오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충격과 혼란을 시작으로 점차 슬픔으로 침전하던 감정의 흐름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삼 일간 치렀던 장례 과정에서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 머무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지 불과 일주일. 온종일 믿을 수 없는 뉴스와 기사들이 화면과 지면을 뒤덮고 있자니, 이젠 그간의 의심을 삼켜야 할 것만 같았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이제는 사실로 받아들일 차례였다.

 이태원 참사와 할아버지의 죽음. 어쩌면 그건 내가 알던 세상이란 곳의 껍데기가 이리 부서지기 쉬운 것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플랫폼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친구와 연인과 모여 웃음을 나누는 여러 사람들이 그토록 생경하게 다가왔던 적이 또 있던가.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 3막에는 주인공 에밀리가 죽고 난 뒤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 집, 가족, 친구들, 식탁 위의 작은 접시와 주전자, 아침이면 집 안 가득 퍼지는 빵 굽는 냄새와 마을에 울려 퍼지는 소란한 아이들의 목소리... 그토록 평범한 보통의 하루가 다시는 손댈 수 없는 세계의 것임을 깨닫는 에밀리는 오열하며 후회한다. 그때는 왜 보통의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을까, 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몰랐을까.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그즈음이 내게는 에밀리가 돌아간 과거와도 같은 몇 주였다.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언제든 처참하게 부서지고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 게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세상의 모든 부산물은 죽음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인간의 작품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형체 없이 떠돌던 죽음을 향한 불안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나의 살아있음이 생경한 순간이었다.

 설 연휴에 즉흥적으로 맞받아친 것처럼 보였던 나의 대답에는 그때의 생경함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멀쩡히 살아남아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아니, 이보다 더 다행인 일이 어디 있어?


올 설에 엄마와 함께 부친 전, 함께 마신 맥주

 명절 잔소리가 듣기 싫은 이유는 보장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대답을 내놔야 하는 부담 때문일 테다. 언제 결혼하니, 시험 준비는 잘 되어가니, 올해 연봉은 얼마나 오를 거 같니, 살 좀 빼야 인물이 살겠다, 그 회사는 계속 다닐 거니…. 나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답을 요구하니 얼마나 답답할 노릇인가.

 아마 그런 질문은 잔소리를 하는 어르신들도 듣기 싫지 않을까? '노후 준비는 다 끝내셨어요?'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어른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보장되지 않는 미래에 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부담이다.

 명절에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아직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서로의 안부를 나눌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자체만을 기념하고 축하해도 충분하다. 이왕이면 보장된 것을 축하하자. 결혼, 직장, 시험 같은 불투명한 미래 말고 웃음, 음식, 덕담 같은 확실한 현재 말이다.

 다음 명절에 잔소리를 듣게 된다면 이제는 웃으며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얼굴 볼 수 있는 게 제일 좋은 소식인데."

 물론, 진심을 담아.


새배하는 어린 조카와 바라보는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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