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아무것도 자를 수 없다
제법이다. 새해가 밝고 마음에 새긴 다짐들을 지금까지 지속하는 내게 하는 이야기다. 용두사미형 인간이라며 자신에 비아냥대는 표현도 아끼지 않았던 나인데 웬 걸, 1월 중순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물론 매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의 지속력이기에 이 글을 적어보기로 했다.)
무엇이 지속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걸까 생각하다 몇 가지 단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는 옷장, 두 번째는 냉장고, 마지막은 서랍장이었다.
작년 말부터 난잡한 옷장, 냉장고, 서랍 안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 무엇을 기념하기 위함은 더욱이 아니었다. 난잡함 속 불편함을 참아가며 사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달까. 길어야 한 두 시간 들여 정리할 수 있을 것들인데 출근 전 양말과 속옷을 겨우 찾는, 썩은 양파와 마늘의 보기 싫은 비주얼을 참는, 줄자 찾기를 포기하고 결국 눈대중으로 치수를 재는 불편함에 익숙해지려는 내가 싫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이라 생각해 마구잡이로 때려 넣고 사용하다 보니 어느덧 1년이 다 가 있었더라.
옷장, 냉장고, 서랍에서 내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난잡하게 흐트러진 내면의 모습. 일부는 곰팡이가 핀 지,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어 진물 이 나와 흐물흐물해진 지 오래고, 여름과 겨울이 질서 없이 뒤섞여 구겨질 대로 구겨지기도 했다.
머리로는 언젠가 해야 할 일이란 걸 알고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신경을 쏟느라 내 안은 지저분해질 대로 지저분해져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럴듯한 계획과 다짐이 얼마 못 가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줄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서랍장 같은 내면으로는 줄자를 포기한 채 규격에 딱 맞는 무언가를 만들 수 없을 테니. 가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아무것도 자를 수 없다.
쓰임에 맞게 정리하고 나니 이젠 더 이상 양말을, 속옷을, 가위를, 줄자를 찾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옷과 물건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규칙을 정해놓고 나니 하루의 시작과 끝도 분명 해지는 요즘이다.
일상이 망가지기 쉬운 이유는 어쩌면 나만의 규칙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은 아니었나 돌아보게 된다. 겨우 옷장이나 서랍을 정리하는 정도로 일상에 활력이 생기는 걸 보면 말이다.
올해 나의 욕심은 보이지 않는 곳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 필요한 것을 적재적소에 채워 넣는 것이다. 필요한 것이 생겼을 때 바로바로 꺼내서 쓸 수 있도록.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을 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꺼내 쓰고 싶고, 망설임 같은 감정이 생겼을 땐 용기를 꺼내 쓰고 싶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을 땐 대화의 기술과 매력을 꺼내 쓰고 싶고, 낯선 외국인과 친구가 되고 싶을 땐 언어를 꺼내 쓰고 싶다. 이것이 새해의 다짐들-책 읽기, 운동하기, 스타일에 신경 쓰기, 외국어 공부 등-이 아직까지 지속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보이는 곳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을 신경 써서 채워 넣고 싶은 욕심이다.
멋진 내가 되고 싶은 욕심의 한편에는 지금 누리는 행복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존재한다. 이를테면 간혹 만나는 친구들과 기울이는 술 한 잔(실제로 한 잔은 아니다), 재밌는 드라마를 보며 시켜 먹는 자극적인 배달 음식, 뒷일 생각하지 않고 훌쩍 떠나는 즉흥 여행 같은 것들. 보통 이런 행복 뒤에는 멋진 나를 향한 여정에 제동이 걸리기 일쑤인데(죄책감 같은 감정이 찾아온다), 올해는 조금 다르다고 느낀다. 친구를 만나고 싶을 땐 친구를 만나고, 늦게 일어나고 싶을 땐 늦게 일어나며, 진탕 술을 마시고 싶을 땐 술을 마신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원래의 패턴을 다시 찾으려 한다. 필요한 물건을 바로 꺼내 쓰려면 사용 후 제자리에 놓는 게 더 중요한 법이다. 내가 되고 싶은 나, 내가 원하는 삶이 뚜렷해졌다면 사용한 나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기만 하면 된다.
멋있는 껍데기를 갖고 싶다. 그 멋진 껍데기의 본질이 온전한 나였으면 좋겠다. 내가 쓰는 글, 내가 하는 말, 내가 그리는 그림, 내가 입는 옷, 내가 사는 공간.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 단단한 내가 묻어 나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1월의 끝을 달려가는 오늘, 이 글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