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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Nov 17. 2016

13. 러너스 하이

참 단순한 세상이야

 "내 친척이 누군지 알아? ○○일보 기자인데, 너희들 이거, 이 짓거리하는 거, 깡그리 몽땅 다 써넣으라고 할 거야!"

 더 이상 아무도 아저씨의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승객은 이미 아저씨 편이 되어 있는 듯했다. 별다른 해결책 없이 비행기가 연착된 지 여덟 시간이 넘어갈 즈음이었으니 아저씨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두가 품고 있던 폭탄을 아저씨가 제일 먼저 터뜨렸을 뿐, 승객들은 하나같이 같은 마음이었다.

 항공사의 대처능력은 어처구니없었다. 2시간만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이 어느덧 4시간, 6시간으로 늘어났다. 죄송하다며 인천공항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만 원짜리 쿠폰 두 장을 나눠줬을 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연착 사유는 '항공기 결함'이라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밝히지도 않아 불안감은 점점 증폭되었다. 승객들은 휴가를 망쳤다며, 중요한 미팅을 놓쳤다며 절규하고 있었다. 이윽고 연착 시간이 여덟 시간이 넘어가자 50대 직장인 아저씨를 필두로 우레와 같은 항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희들 미쳤어? 이거 놓치면 날아가는 돈이 얼만진 알아?!"

 "제 휴가 망치신 건 어쩌실 거예요? 예약한 호텔이랑 교통권 다 어떻게 하실 거냐고요?"

 "아니... 죄송하다고만 하지 말고, 해결을 좀 해 봐!!!"

 "보상은 해주려고 이러는 거요?"

 중요한 미팅도, 휴가도 없던 친구와 나는 쿠폰으로 산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빨아먹으며 이런 광경을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주말연속극 TV 앞에 앉은 시청자처럼.

 "1년에 한 번 있는 휴가를 이렇게 망치면 진짜 짜증 나긴 하겠다."

 "그러게. 그나저나 비행기 상태는 괜찮은 거야? 불안해 죽겠다."

 "나도. 비행기 막 추락하거나 하진 않겠지?"

 "… 혹시 모르니 죽기 전에 많이 먹어 둬."

 여덟 시간 동안 꼼짝 않는 창 밖의 비행기를 바라보며 프라푸치노의 남은 휘핑크림까지 남김없이 흡입했다. 설마 추락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추락을 대비해 뱃속 가득 열량을 채워뒀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 또한 승객들이 잔뜩 모여있는 게이트 앞으로 다가갔다. 승객들의 분노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게이트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소리 지르는 사람부터 시작해 기다림에 지쳐 엉엉 우는 아기와, 신고를 하겠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아저씨까지. 그야말로 혼비백산이 따로 없었다. 승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고개를 숙여가며 연신 "죄송합니다."를 되뇌는 승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승무원의 사과가 더 애처롭고 간절해질수록 승객들의 목소리는 더 높아져만 갔다. 빗발치는 항의 속에 나도 조용히 한 마디 꺼냈다.

 "저…, 비행기 안전한 거죠?"

 애써 고개를 든 승무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승무원은 굳어버린 얼굴 근육을 애써 움직이며 웃는얼로 대답했다.

 "이제.. 마지막 점검이 막, 끝났습니다.. 항공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얘기하는 승무원을 보고 있자니 참 안됐다 싶었다. 그래,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어. 항공기 결함이라는데. 안쓰러운 마음에 "사람들 말,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라고 말하려다 핏발 선 눈동자로 항의하는 승객들을 보자마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애매한 미소로 승무원의 답변에 응답한 채 그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니스 코트다쥐르 공항에서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 편이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비행기가 연착됐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항공사는 사과하지 않았다. 연착 사실도 전광판에만 띄웠을 뿐, 구체적인 공지마저 없었다. 그런데 놀라웠던 건, 누구 하나 화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몇 시간이고 침착하게 시간을 보내며 탑승을 기다렸다. 그들은 동행한 가족, 친구들과 대화나 게임을 하며 뜬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 중 누구 하나 중요한 미팅이나 휴가가 없었을까. 그 침착함과 유연함에 적지 않게 놀랐다. 지금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반응이지 않은가.

 굳이 니스 공항과 인천 공항을 비교해가며 우열을 가르려는 게 아니다. 단지 나는 정말로 놀랐을 뿐이다. 승객들의 태도에 말이다. 그들도 다 똑같은 사람일 텐데, 일정이 꼬이고 약속이 깨져 적지 않게 화가 났을 텐데,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항공법규상 컴플레인이 불법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뭘까, 단순한 문화 차이일까, 모든 사람이 마치 러너스 하이에 도달하기라도 한 걸까. 뭐,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오갔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마라톤에서 체력과 정신이 한계치를 넘을 때 상쾌해지는 순간을 뜻한다. 신체는 그대로 달리고 있는데 정신적으론 전혀 힘들지 않은 상태다. 혹자는 이 상태를 "하늘을 걷는 느낌" 혹은 "꽃밭을 걷는 기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달리기 애호가로 유명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주제로 한 자신의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러너스 하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지경(無我之境, 정신이 한 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의 상태와 비슷할지 모르겠다. 본인 스스로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있다 생각하지만 몸은 계속해서 행동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나도 러너스 하이를 경험한 적이 있다.

 훈련병 시절이었다. 그 해 겨울은 방송에서 앞다퉈 60년 만에 찾아온 추위니 뭐니 떠들어댈 정도로 유독 추웠다. 그런데 하필이면 유독 추웠던 그 해 겨울이 바로 나의 훈련기간이었다. 그 추운 날 체력측정을 하겠다며 4km 달리기를 시켰다. 입대 전 제대로 된 운동이라곤 해본 게 없었으니 나의 체력은 당연히 저질이었다. 60년 만에 찾아온 한 겨울의 추위 속에서 초저질 체력의 훈련병이 연병장 4km를 뛴 것이다.

 처음에는 견딜만했다. 하얀 입김을 내뱉고 몸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오호, 할 만 한데, 싶었다. 그러나 한 바퀴, 두 바퀴씩 연병장을 도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열심히 뛰었지만 거센 찬바람이 노력의 결실인 코 끝의 땀방울들 마저 앗아갔다. 억울했다. 얼굴색은 빨갛다 못해 잘 구워진 군고구마 빛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약 1km를 남겨둔 순간엔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런 생각이 없어졌다. 하루키 말대로 눈 앞의 구름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러너스 하이였다. 그때부터는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았다. 몸이 마치 기계처럼 알아서 움직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완주가 가능할까 싶었던 4km를 완주했다. 완주와 동시에 철퍼덕 쓰러지긴 했다만.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러너스 하이를 매일같이 느낄지도 모른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하나만 뛰어도 처음엔 물에 적신 솜뭉치처럼 무거웠던 몸이 열이 가해질수록 쌩쌩해지는 걸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쌩쌩해진 몸으로 달리다 보면 여러 가지 잡생각으로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 된다. 그저 달리고 있는 행위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운동을 찾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니스 공항의 승객들은 땀 한 방울 내지 않았는데도 러너스 하이에 도달한 사람들 같아 보였다. 혹시 분노 게이지가 한계치를 넘어서 해탈을 한 것일까. 그렇다기엔 표정들이 처음부터 한결같이 너무 평온해 보였다. 아니면 항공사 약관에 「비행기 연착 시엔 티켓값을 100% 환불해 드립니다」 같은 사항이라도 있던 걸까. 당연한 애기지만 세계 어느 항공사도 그런 약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뭐였을까. 그 여행이 끝날 때까지 답은 알 수 없었고, 아직까지도 궁금증으로 남아있었다.

 하나 바로 눈 앞에서 직접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승객들과 그들을 상대하느라 벌벌 떠는 승무원들을 보니 답을 알 것 같았다.

 니스 공항 승객들이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화를 내도,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승무원에게 삿대질을 해도, 큰 소리로 협박을 해도, 잃어버린 휴가가, 중요한 미팅이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남는 건 상처받은 사람들과 상한 감정으로 얼룩덜룩 지저분해진 추억일 뿐. 니스 공항의 승객들은 모처럼 가진 그 소중한 시간을 비행기 연착 따위 때문에 지저분한 추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는 분노를 표출하고, 또 누군가는 그 분노에 상처를 받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고 있자니 그 답이 명확해졌다. 어차피 항공기는 여덟 시간 이상 연착됐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내가 바라는 건 부디 안전하게 목적지에 내려주는 것뿐이었고, 항공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역할도 그게 전부였다. 미안하다며 만 원짜리 쿠폰 두 장까지 주지 않았던가. 물론 항공사가 빼앗은 여덟 시간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보상일 수 있으나, 그렇다고 전 승객들을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항공사는 나름대로 노력을 다했다. 승객들도 기다리는 것 이상의 노력을 보여줘야 했다. 승객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그 시간을 최대한 아깝지 않게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정을 소비하며 그 시간을 아깝게 소모하고 있었다. 가장 행복한 시간을 나눠야 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 애인, 친구를 바로 옆에 두고 말이다.

 나 또한 여행 계획이 틀어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랜 시간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첫날 1박만 계획된 호찌민 여행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또 이 이상 연착이 된다면 호찌민에 예약해 둔 호텔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상황이었다. 물론 항공사는 그것까지 보상해 줄 생각(혹은 능력)은 없어 보였고.

 하지만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 같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덟 시간 비행기가 연착되어 공항에 표류된다는 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지 않은가? 마치 영화 <터미널>처럼 말이다. 톰 행크스가 되어 쿠폰으로 산 프라푸치노를 먹으며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자면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가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 경험 덕에 이렇게 글 쓸 소재도 생기지 않았는가.

화를 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저 승무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고, 친구이며 애인일 텐데. 분명 오늘 근무가 끝나면 무거운 승무원용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강둑 포장마차에 홀로 앉아 소주를 몇 병이고 비워댈 것이다. 에라이, 개 같은 아저씨! 를 외치면서 말이다. 누군가의 가슴에 박은 못을 빼내긴 쉬워도, 못을 뺀 자국은 평생 남는다. 그렇게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본인 마음도 당연히 좋을 리 만무하고.

 불합리한 상황을 참고 견디라는 얘길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승객은 돈을 내고 티켓을 구입했기에, 정확한 시각에 서비스를 제공받는 게 사실 정상이다. 그러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승객들은 비행기를 타는 행위 자체를 기대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회사에서 쌓인 묵힌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 누군가는 가족들 간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업무상 중요한 미팅을 가지기 위함이었일 텐데, 왜 다들 비행기에 목숨을 걸까. 바로 곁에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들을 그냥 두고 말이다. 설사 항공사가 백 번 양보해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를 해줬다 해도, 티켓값을 상당 부분 환불해줬다 해도 승객들이 떠나기로 결심한 목적이 변하진 않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현재를 즐기는 게, 그게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왜 자신의 가슴속까지 태워가면서 그 아까운 시간을 소모해 버리는 걸까.


 연착된 지 여덟 시간 하고도 삼십 분쯤 더 지났을 무렵, 드디어 비행기가 출발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너도 나도 목에 핏대를 세웠던 승객들은 툴툴거리면서 승무원들의 절차를 밟으며 하나 둘 비행기로 올라탔다. 승무원들은 죄지은 사람처럼 승객들의 눈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티켓과 여권을 확인했다.

 빗발치는 승객들의 항의는 기내에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예상외로 사람들은 그냥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여기저기서 "드디어 비행기 출발한대" 같은 안부 전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뿐, 원래 시각에 탔어도 비슷할 분위기일 것 같았다.

 항공기는 이륙 절차에 맞춰 안전하게 이륙했고, 감정 소모에 체력을 다 쓴 탓인지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곯아떨어졌다. 불과 십 분 전만 해도 전쟁터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긴, 일단 이 비행기에 믿고 몸을 맡겼으니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는지도. 나 또한 피곤으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비비며 숨을 돌렸다. 머리를 기댄 창 밖엔 불빛으로 수놓은 수많은 고속도로의 가로등과 차, 건물들의 야경이 보였다. 그제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 단순한 세상이야…….'

 고개 돌려 뒤를 돌아보니 세상 모르고 잠든 승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맨 앞자리를 차지한, 자신의 친척 기자에게 기사를 쓰게 하겠다고 윽박지르던 아저씨였다. 아저씬 좁은 이코노미석에 끼여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아까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한 손에는 빈 맥주캔을 든 채 코까지 골고 있었다. 하하하. 이 아저씨, 드디어 러너스 하이에 도달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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