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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Oct 30. 2016

12. 욕먹기 싫어요

실은 착한 게 아니라 착한 척하는 거야

 한때 서점가에 <미움받을 용기> 라던지, <착한 사람 콤플렉스>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적이 있다. 두 책 모두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아, 사람들의 관심을 가질 만도 하겠구나' 싶은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첫 째, 제목만으로 내 마음을 끌어당겼고, 둘째, 제목만으로 내 마음을 끈 책이 베스트셀러라면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같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열 자가 채 되지 않는 짧은 제목만으로 독자의 마음을 끌 수 있다는 것은 그 제목이 가진 힘, 그러니까 강력한 공감대의 형성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서점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비우러 가기보단 채우러 간다. 미지의 세계의 이야기를, 부족한 전공의 지식을, 일상에 치여 텅 비어버린 가슴속을. '음~ 무엇을 채워볼까'하며 서점을 찾았는데 세상에나, 본인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고민을 표면 위에 그대로 드러낸 책을 무려 '베스트셀러'란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미움받을 용기>라니! 그래, 평소 학교에서, 직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집에서, 뱉고 싶어도 욕먹을까 꼭꼭 삼켜뒀던 말, 미운털이 박힐까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만 했던 행동들은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였어.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구나.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니! 사람은 당연히 '착해야'되는 거 아냐? 그런데 그게 콤플렉스라니! 하긴, 생각해 보면 '착해야 한다'는 것 또한 내가 욕먹기 싫어서 선택한 방법이잖아? 착하다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닐 수 있겠구나. 베스트셀러에 오른 걸 보면 이런 생각, 나만 하는 게 아니구나. 이 책이라면 그런 고민들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 평소에 끙끙 앓고 있던 마음의 병을 <미움받을 용기>라던지 <착한 사람 콤플렉스> 같은 짧은 제목 속에서 확인받은 듯 해, 강한 끌림을 느낀 것은 아닐까.


 착한 사람이고 싶다. 늘 그래 왔다. 생각해보면 그냥 욕만 먹고 그칠 일도 많았는데, 욕먹는 게 뭐 그리 무섭다고 늘 돌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고야 말았을까. 내가 누군가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는다고 해서 커다란 이윤이나 기분 좋은 감정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 책의 제목에 관심을 가졌듯이 나 또한 두 제목에서 강력한 끌림을 느꼈던 건, 내겐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고, 누구에게나 착한 사람이고 싶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 글을 '난 그런 아이였고, 지금은 극복했어요'같은 성장드라마 같은 느낌으로 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난 여전히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이고, 모두에게나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냉정한 시선으로, 밑도 끝도 없는 나의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까보는 글을 써보려고 한다.

 흠흠, 준비됐니? 내가 쓴 글에 내가 상처받을 수도 있어.


 아주 어렸을 적, <꾸러기 수비대>라는 만화를 너무 좋아했었다. 십이지신을 모델로 한 <꾸러기 수비대>의 주인공 '똘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였는데, 집 앞 문방구에 갔더니 이 '똘기'가 프린팅 된 500원짜리 수첩을 팔고 있었다. 아홉 살 아이의 눈에 뵈는 게 뭐가 있었겠나. 똘기 수첩을 발견한 순간부터 눈에 반짝 불이 들어오며 '이건 사야만 해'모드가 되어버렸다. 하나 아홉 살의 주머니는 가벼웠다. 당시 500원은 학교 앞 슈퍼에서 오락 한판을 하고 맥주 모양 사탕과 사바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도 200원이 남는, 아홉 살 아이에겐 꽤 큰돈이었다. 똘이 수첩을 내 품에 안길 방법은 달리 없었다. 그래서 훔쳤느냐, 그건 아니었다. 미움받을 용기도 없는 우유부단한 성격인 내게 그런 담력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담력이 없는 난 (당시 집에서 운영하던)우리 집 슈퍼 금고에서 500원을 훔쳤다. 그래도 1촌 관계인 아빠, 엄마 돈을 훔치는 게 보다 안전하다 생각했나 보다. 그리고 바람대로 똘기 수첩을 내 품에 안겼다. 그런데 다음 날,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엄마가 내가 금고에서 500원을 꺼내갔다는 사실을 알아 차린 것이었다. CCTV도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어찌 됐든 엄마는 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 수첩 어디서 났니?',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이 뭐라고 했지?', '너 금고에서 몰래 돈 꺼내갔지!' 계속해서 거짓말로 방어하다 막다른 골목에 갇힌 난 결국 시인하고야 말았다. 그 날 먼지 나게 맞았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미움받기 싫어했던 행동'이다. 애초에 똘기 수첩을 갖고 싶었으면, 엄마에게 사달라고 얘기해 볼 수도 있었던 것을 시도조차 안 했던 이유는,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 물건을 사 들인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돈 훔친 것을 들켰을 때 바로 시인하지 않았던 것도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크게 모난 구석 없이 학교에서 꼬박꼬박 상까지 받아오는 '착한 아들 이미지'에 먹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스스로 '착한 아들'이라는 프레임을 씌우지 않았다면, '될 대로 돼라'식으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엄마한테 고래고래 소리 질렀을 것이 분명하다. "그뤠애애!!!!! 내가 훔쳤다!!!!!!! 아 쫌!!!!!! 겨우 500원 좀 쓴 건데 어쩌라고!!!!!!!"

 이후에도 착한 아들은 계속됐다. 한 살 터울의 누나는 대외적인 성격으로 친구들과 활발하게 놀러 다니며 약간의 비행(?)도 저지르는 스타일이었기에, 완전히 상반되는 성격의 나만이라도 아빠, 엄마를 피곤케 만들면 안 된다며 의무감까지 느꼈다. 부모님껜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드렸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일까.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누구에게나 착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버렸다. 기분이 조금 안 좋아도, 다수의 의견과 충돌되더라도, 곤란한 상황이더라도, 스스로를 조금 희생해서라도 착한 사람으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누군가에게 내 성격을 묻는 질문을 던지면 '착해', '걔? 착하더라'같은 대답이 쉽게 나왔으니까.

 그래서 내가 얻은 건 무엇이었을까? 바람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안으로 썩어갔다. 본심은 그게 아닌데, 왜 웃고만 있어야 할까. 진짜로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이걸 왜 꼭 해야만 하는 걸까. 스스로 착한 사람 프레임에 들어 가 놓고선, 그 속에 빠진 채 허우적 댔다.

 클라이언트의 주문을 받아 공연 포스터나, 기업 로고를 만들어주는 외주 작업을 할 때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너무 큰 짐이 됐다. 돈만 밝히는 사람처럼 비치고 싶지 않은데, 진심으로 클라이언트를 생각해서 작업해주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본인의 주문만 끊임없이 요구했고 덕분에 나는 몇 날 며칠을 새 가며 노트북 앞에 앉아 이를 바득바득 갈아댔다. 그놈의 정이 뭔지. 사실 정 따윈 없다. 그냥, 냉정하게 했다간 '너무 정이 없네요'라는 욕을 먹기 싫은 것뿐이지!

 이런 성격의 가장 큰 문제는 '거절을 못 한다'는 것이다. 거절을 한다고해서 밤늦게 그 사람이 식칼을 든 채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집 안으로 쳐들어올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결국 거절을 못한다. 그중 가장 하기 힘든 거절은 그림 그려 달라는 부탁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어쩌면 거의 모든 사람들) 그림 그리는 것을 '노동'으로 인지를 못하는지, 너무나도 쉽게 '그림 그려달라'라고 부탁을 한다. 심지어는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저는 그림도 그리는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하면 "와, 그래요? 그럼 제 얼굴 좀 그려줘요."라고 대답한 경험 횟수를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 이는 요리하는 지인의 식당에 가서 "요리 좀 하시니까 음식 값은 공짜로 해줘요."라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 거다. '그림은 재료비가 안 들잖아요. 그냥 간단하게 종이 위에 슥슥 그리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실제로 있었다.) 20년이 넘게 그림 그리기 위해 쏟았던 시간과 노력은 어찌 계산이 안 되는지. 뭐, 이런 류의 사람은 커피 값의 원가가 몇 십원, 이런 얘기를 듣고 방방 뛸 사람들이니 굳이 상대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러면서도 몇 십만 원 하는 브랜드 의류나, 신발등을 사는 걸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어찌 됐든 '죄송해요. 그림 그려드리긴 힘들어요.'라고 대답하면 쪼잔한 사람, 까다로운 사람, 돈만 밝히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그들 때문에 도저히 거절하기가 힘들다. 솔직히 거절할 때 죄송하다 얘기하는 것도 짜증 난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탁을 하는 사람에게 내가 왜 죄송해야 하는건지.

 문제 해결은 사실 간단하다. 착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아내의 유혹>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민소희가 착한 아내로만 살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점찍고 등장해서는 나쁜 여자의 정점을 찍지 않던가.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착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쉽게 말해 얼굴에 철판을 깐다고 하지.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개 썅 마이웨이'하는 것이다. '그림 좀 그려줘요'하는 말도 안 되는 부탁엔 '닥치세요'라고 대답하고, '포스터 글씨체랑, 컬러랑, 여기 이미지도 싹 다 다시 해주세요'하는 무리한 클라이언트의 부탁엔 '그러니까 싹 다 밀어버리면 되죠?'라고 대답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그게 어렵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고 싶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건 지나친 욕심이고, 결국 진짜 착하다는 의미와는 다른, '욕먹지 않기 위해 착한'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그냥 이 자리에서 인정하려고 한다. 나는, 착한 게 아니라 착한 척하는 거다. 욕먹기 싫어서, 혹시 나쁜 불이익이 생기진 않을까 싶어서,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착한 척하는 거다. 가면 뒤의 내 얼굴을 보면 심히 놀랄 것이다. 썩을 대로 썩은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이 있을 테니.

 솔직히 말해 아직까지도, 어쩌면 영원히, 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버릴 수가 없을 것 같다. 20년이 넘게 이렇게 살아왔으니 쉽게 고쳐질 리 없겠지. 그런데 이제는 썩어버린 나를 조금이나 치유하자는 차원에서, '착해야 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냥 '착한 척 하자'로 전환해보고자 한다. 가식의 가면을 쓸 거면 아예 확실해지자는 거야. 욕하고 싶은데 어차피 욕 못할 거, 귀가 찢어질 정도로 웃어주며 대답해 버리는거지. <미움받을 용기>를 찾는 것보다, 그 편이 더 빠를 것 같다.

 하, 어쩐지 씁쓸한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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