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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an 01. 2017

15. 이 시대에 공기인형으로 산다는 것

언제든 대체 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일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으니까."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싶은 종류의 것이 아닌, 잊었던 무언가를 일깨워 준, 그런 종류의 충격이었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니어도 해낼 사람은 널려 있다는 것, 생각보다 나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란 것, 나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란 것을.
 애써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는 별 같은 존재임을, 어디선가는 가치를 알아줄 것임을 굳게 믿으며 스스로를 위안했을 뿐, 실은 내일 당장 사라져도 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랄 게 1도 없는 작은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사장님이 내게 그런 것들을 일깨우게 해주고 싶어 한 얘기가 아니란 걸 안다. 근래 들어 일에 대한 열정이나 욕구가 식은 것을 알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알바인 내가 괘씸했던 것이다. 이해했다. 사장님은 돈 주고 나를 고용한 '갑'이고, 나는 돈 받고 시키는 일을 하는 '을'이었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라버리는 것, 그런 권력이 그녀에게 있음을 이해했고 그렇기에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음도 이해했다.
 하나 이해하는 머리와 다르게 내 가슴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려앉았다. 내게 그 한마디는 단순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뿐만이 아닌 '나'란 사람 전체를 흔들어 놓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무 살이었다. 대개 친구들이 대학에 입학해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고 있을 나이, 스무 살. 내 몸은 캠퍼스가 아닌 대학로의 어느 작은 카페 안에 있었다.
 재수를 했다. 고3 때 시작한 연극영화과 입시에서 낙방의 쓴 맛을 보고 결정한 선택이었다. 1년 씩이나 또 입시를 한다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도 부모님께도 짐이라 여겨 카페 알바를 시작한 것이다.
 알바는 단순히 용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부모님께는 '이만큼이나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어요'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고, 나 자신에겐 고3 입시생 때와는 다른, 입시 연습에 +a를 해낼 수 있다는 도전의식의 지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바쁜 학원 스케줄에 알바를 '굳이' 집어넣었던 것이다.
 알바가 아닌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지막 C대 시험을 마치고 나오던 그 날,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에 최고조로 우울해있었다. 어렵게 잡은 마지막 기회였고, 정말 가고 싶었던 학교였기에 그 실망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너털거리는 발걸음으로 평소에 자주 찾던 카페, 대학로의 학림다방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은 학림다방은 여전했다. 자연광에 기대 어둡게 조명을 밝힌 어두운 실내에 몇 팀 안 되는 손님이 띄엄띄엄 앉아있었고, LP판엔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가 막 흘러나오던 참이었다. 혼자 온 손님은 나 혼자인 듯했다. 나는 창가의 6인석 자리를 홀로 차지하고 앉아선 뜨거운 블랙커피와 오렌지 마멀레이드가 곁들여진 수제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리곤 가방에서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우울함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따위에 대해 두서없이 적어 내려갔던 것 같다. 그리곤 눈 앞의 블랙커피를 바라보며 종이 위에 까맣게 줄을 긋기 시작했다. 까만 모나미 볼펜으로 흰 종이를 빈틈없이 채워갔다. 숨이 막혀 창 밖으로 눈을 돌리자 겨울바람에 발을 동공 구르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연인, 친구,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찬 바람은 앙상한 나뭇가지의 마지막 잎새까지 앗아갔건만,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하하호호 웃고 있었다. 새까매진 노트 속 내 세상과는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얇은 유리창을 스크린 삼아 비정상적으로 행복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들, 어디니?"
 터져버렸다. 모든 것이. 노트 위에 꾹꾹 눌러 적은 고민과 슬픔이, 빈틈없이 채워진 시커먼 종이가, 나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창 밖의 비정상적으로 행복한 영화가 엄마의 목소리 하나로 모두 터져 버렸다.
 어느새 <랩소디 인 블루>는 클라이 막스에 다다랐다. 나는 우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옷소매로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그리곤 커다란 6인석 테이블에 몸을 묻어 버린 채 하염없이 울었다. 테이블 위 찻잔이 흐느끼는 나를 따라 달그락 소리를 내었다. 입을 막고 우는 나를 위해 대신 울어주듯이.
 감정을 조금 진정시키고 나자 걱정하지 말라며 엄마와 전화를 마무리하는 내가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다시 창 밖을 바라봤다. 행복한 영화는 계속 상영 중이었다. 나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내 슬픔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처럼. 정말, 이 곳엔 나 혼자구나, 생각했다.
 한바탕 울고 나자 배가 고파졌다. 시켜놓고 한 입도 떠먹지 않은 치즈케이크가 보였다. 크게 떠서 입 안 가득 집어넣었다. 그 와중에 너무 맛있다. 갑자기 세상에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 세상엔 나와 치즈케이크 둘 뿐이다. 한 손으론 눈물 콧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내면서도 다른 한 손으론 치즈 케이크를 바쁘게 퍼 먹었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 와중에 노트 위에 적은 계획은 더 코미디였다.

 1. 미국으로 유학 가기 2. 미국으로 여행 가기 3. 미국으로 이민 기기
 참고로 나는 미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아는 친척이라던지 친구 따위도 없다. 대체 왜 '아메리칸'드림을 꿈꿨는지 모르겠다만 당시 나는 사뭇 진지했다. 심각하게 언제쯤 가야 할지 스케줄을 살펴보았을 정도로.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마음은 벌써 라라랜드에서 춤추고 있었다. '거지 같은 이 세상! 미국이라면 나의 진가를 알아줄 거야!'같은 개떡 같은 생각을 했던 듯싶다. 비행기 표까지 알아봤다. 백 만원이 넘었다. 다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다.
 알바가 아닌 다른 방법은 자본주의의 높은 장벽 앞에서 1초 만에 무너졌다. 나의 진가를 알아주기도 전에 그곳 땅을 밟지도 못하는데 어떡하겠나. 뭐 사실, 돈이 있었어도 금방 그 계획을 접었을 것이다. 미국 갈 여건이 안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목표'가 없었으니까. 그렇다. 미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미국에서의 첫 시작'을 위함이 아닌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도망가기'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내 그것을 깨닫고 인정한 나는 이 '시궁창 현실'을 딱 한 판만 더 해보기로 했다. 대신 후회하지 않기 위해 더 치열하게, 더 열심히! 그래서 입시뿐만이 아닌 알바까지 하려 했던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처음부터 '일 하기 싫으면 얘기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카페 일에 흥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심지어 사장님은 날 굉장히 좋아하기까지 했다. 카페 일을 소개해준 건 친누나였는데, 나보다 먼저 그곳에서 일하던 누나가 사장님이 이쁨을 받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누나 덕에 일도 쉽게 구했고, 첫인상도 나름 좋게 먹혔다. 누나가 있어서 일을 배우기도 편했다. 커피를 만들고 손님들을 상대하는 일도 재미있었다. 같이 일하는 형, 누나들도 좋은 사람 같았다. 첫 알바 치고 꽤 성공적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점점 일이 익숙해질수록,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해질수록 지쳐갔다. 나 자신이 커피 만드는 기계처럼 느껴지는 것은 일의 익숙함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매너리즘이라 쳐도, 사장님의 무리한 부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납득할 수 없었다.
 사장님은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신메뉴 홍보 그림'등을 그려달라 부탁했었다. 처음엔 흔쾌히 그 부탁을 받았지만, 부탁이 반복될수록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졌다. 카페 채용조건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던 것도 아니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수록 점점 그녀의 안 좋은 점만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식사시간은 30분 이내로, 식대는 3,500~4,000원 사이에서 고를 것, 페이는 최저임금, 손님들에게 나가는 음식, 음료는 최대한 재료를 아껴서.'

 그녀가 돈만 보고 장사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즈음 카페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식어버렸다. 물론 그녀가 돈을 위해 장사를 하든, 다른 가치를 위해서 하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고, 상관할 권리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사실 내가 먼저 그곳에서 나오고 싶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어쩌겠는가. 그러나 그곳에서 계속 일하는 누나의 입장도 있고, 내가 일을 할 수 있게 된 이해관계를 생각하니 그만둔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결국 의욕 없이 일하는 내 태도로 드러났단 것이다.
 사장님은 누나에게 몇 차례 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던 적도 있다. 표정이 처음 같질 않다, 웃지를 않는다, 일 하기 싫어 보인다. 고용주 입장에선 당연히 껄끄러울 문제였겠지만 최저임금을 받으며, 3,500원짜리 밥을 창고에 쭈그려 앉아 후다닥 먹어야 하는 복지 수준의 카페에서 무료로 그림까지 그려줘야 하는데, 웃어야 하기까지 하다니. 그런 근무환경 속에서 웃음까지 바라는 건 솔직히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어느 날 사장님은 설거지하던 나를 데려다 이렇게 얘기한 것이다.
 "요즘 일 하기 싫지? 일 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으니까."

 내가 받은 충격의 책임을 사장님에게 돌리고 싶진 않다. 그녀는 사실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단칼에 잘라 버리지도 않지 않았는가. 그 흔한 '갑의 횡포'도 부리지 않았다. 내게 그만둘 수 있는 여지를, 기회를 먼저 제공해 준 것이다.
 머리는 그렇게 사장님을 이해했다. 내가 사장이어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슴이, 가슴이 너무 아팠다.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린 기분이었다. 왜, 못 생긴 애한테 '너 못생겼어' 얘기하면 진짜로 상처받지 않는가. 나도 그러했던 것이다. 나란 존재가 언제든 대체 가능한 공산품이란 것을 알고 있는데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라 더 아팠다. 요즘 말로 '팩트 폭력'당한 것이다.

 수많은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며 교수들 앞에서 연기하고, 노래하고, 평가받고, 불합격 통지서를 받길 반복했다. 그런 시간이 반복되다 보니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내가 이 일에 재능이 있는 걸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불합격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잘 생기고, 연기 잘하고, 노래 잘하고, 매력 있는 친구들이 넘쳐났으니까. 나를 뽑지 않는 건 당연했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쓸만한 부품을 뽑겠지. 나는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녹슨 나사 같은 존재니까. 뽑지 않는 게 당연해.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더 멋진 나사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더 대단한 역할은 못하더라도 갈고닦으면 쓸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기대감으로, 바람으로, '시궁창 현실'을 딱 한 판만 더 하기로 한 것이다. 누구나 처음부터 질 생각으로 게임을 시작하진 않지 않는가. 그래도 나름 괜찮은 엔딩을 바라고 시작 버튼을 누른 것이다.
 그러나 쓸만한 나사는 어디에나 넘쳐났다. 내 위치는 딱 그 정도였다.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굳이 나일 필요가 전혀 없는,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워홀의 끝도 없는 캠벨 수프 통조림 중 하나에 불과한, 딱 그 정도의 존재. 존재는 하지만 정말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예전에 봤던 영화 <공기 인형>이 떠올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배우 배두나가 주인공 '노조미'로 출연한 영화다. 노조미는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다. 그것도 그냥 인형이 아닌 공기를 주입해 '사용'하는 섹스돌이다. 영화는 어느 날 갑자기 노조미가 생명을 얻게 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생명을 얻은 노조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심지어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을 가져버린 것이다. 마치 그냥 평범한 여자처럼. 하지만 그녀의 본 용도는 자위용 섹스돌. 섹스돌의 용도가 늘 그렇듯, 주인은 노조미에 질려 새 섹스돌을 사 오고 그녀는 결국 버려진다. 쓰레기통에 말이다. '대체'된 것이다.
 노조미는 '나는 누구일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그녀는 그녀의 집을 찾아 자신이 담겨 있던 포장 박스를 뒤져보며 그 안에 들어 가 보기도 하고, 급기야 자신이 만들어진 공장까지 찾아간다.
 결국, 감독이 노조미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 우리였던 것이다.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 이 세상에 버려져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우리들의 모습. 그리고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공산품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 노조미는 곧 나였고, 나는 곧 노조미였다. 속이 텅 빈 공기 인형. 그것만큼 내 존재를 잘 표현하는 오브제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그런 시기를 맞이한다. 내가 공기인형이었음을 알게 되는 시기. 그것은 외모나 직업, 재력, 권력 등의 위치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런 수식들이 본인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화려하기만 한 모습이, 직업이 새겨준 나의 위치가 본인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모두 공기 인형으로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사회를 움직이는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는 공기 인형.
 그 사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장 사라진다 해도 60억 인구 통계치에 작은 변화도 주지 못할 아주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으로 마이너스된 통계는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생명으로 메워진다. 육체는 그저 빌려온 것이다. 사라진 육체는 새로운 생명의 육체에 양보하고,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 이게 삶이고 인류는 늘 그렇게 흘러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당시만 해도 나는 못 견디게 괴로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거니까. 어떤 화려한 옷을 입어도 난 그저 속이 텅 빈 공기 인형일 뿐이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하루에도 폭죽처럼 터지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그러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았다. 비록 나의 역할이 언제든 대체가 가능하다 할지라도,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애인, 친구의 역할까지 대체할 순 없겠구나. 노조미가 '마음'을 가져버려 사랑에 빠졌듯이,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았듯이, 나 또한 누군가의 전부였던, 또 누군가를 전부로 품음으로써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것도 아주 충만할 정도로.
 내가 우주 속의 먼지 같은 존재이면 어떤가. 내 안에 우주를 품고 있는데 말이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 사랑을 한다는 것, 그것은 내 안에 우주를 만드는 일이었던 것이다.
 일이라는 거, 재력이나 직업 따위의 위치 같은 거, 사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의 효율을 위해 인간이란 존재가 편의상 만들어낸 것뿐이다. 직장에서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이면 뭐 어떤가? 오히려 내가 더 땡큐다. 그 자리는 나란 존재를 규격화시킬 뿐이니까. 하지만 사랑이란 것은, 그것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다. 사랑으로 엮인 관계는 스스로의 존재를 규격화시키지 않는다.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니, 참 다행이다. 만약 카페 알바가, C대 연영과 학생이 '꼭 나여야만 하는 역할'이었다고 생각해봐라. 끔찍하다. 나는 그 안에 나를 규격화시켰을 것이고, 나의 '진짜 역할'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을 것이다.
 언제든 대체 가능해서 참 다행이다. 노조미가 섹스돌의 역할에서 해방됐던 것도 결국 대체되었기 때문 아닌가. 그리고 정말 중요한 '사랑'을 찾지 않았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대체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동생, 애인, 친구인 나를 그 누구도 절대 대신할 수 없듯이 말이다.

 카페 알바는 사장님의 그 얘기를 듣고 바로 그만뒀다. 그땐 그런 말을 한 사장님이 미웠지만, 7년 가까이 지난 지금, 감사한 마음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사장님께 다시 대답을 할 수 있은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을 알려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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