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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an 10. 2017

16. 예쁜 게 좋아. 예뻐야 돼, 뭐든지.

외모 콤플렉스에 대하여

나는 예쁜 것을 좋아한다. 여기서 말하는 ‘예쁜 것’은 말 그대로 ‘외형이 깔끔하고 예쁜 것(pretty와는 조금 다른 의미다. look nice의 의미에 가까움)’을 얘기한다. 사람은 물론이오, 디지털 기기, 책 표지 디자인, 플레이팅 된 음식, 자주 찾는 식당, 새로 산 옷 등(심지어 변기까지!) 그 기능을 막론하고 무조건 예쁜 것이 좋다. 왜,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이런 명대사도 남기지 않았나.

 “예쁜 게 좋아. 예뻐야 돼, 뭐든지.”

 그래서 난 한국에서 쓰기엔 최악의 환경이라는 맥북을 쓰고, 수입 맥주 한 캔을 구매할 때도 우선적으로 디자인이 예쁜 걸 고르며, 보통은 한 번 쓰고 버리는 로드샵의 종이봉투도 (예쁘면)창고에 보관해둔다. 다 이것들이 ‘예뻐서’ 하는 행동이다.

 무언가를 구매할 때 디자인은 내게 최우선의 가치이다. 설령 어딘가 하나 부족해도(고장이 잦더라도) 그것이 지나치게 예쁘다면 어느새 난 구매 버튼을 누르고 있다. 속물이라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예쁜 것에 끌리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이건 본능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기능이 완벽한 물건이라 해도 디자인이 별로면 사용할 때마다 화나는 걸 어떡합니까. 도무지 어쩔 수가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토록 예쁜 걸 좋아하는 나 자신은, 학창 시절 내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 있는 아이였다. ‘뭐든 예뻐야 돼’를 외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look nice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비치는 내 모습이 뵈기 싫어 일부러 시선을 흐리거나 피하는 건 다반사요, 학창 시절 내내 모자와 옷으로 얼굴과 온몸을 다 가리고 다니기도 했었다. 새로 입학한 후배가 1년이 지나고서야 내 얼굴을 봤다는 일화도 있었으니, 콤플렉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강 상상되지 않는가. 그때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 후배의 당황스러움이 백 번 이해된다. 캡 모자나 비니 따위를 앞은 보일까 걱정될 정도로 머리통 깊숙이 박아 놓았다. 무슨 골무 씌워 놓은 엄지손가락 같기도 하고……. 왜 저러고 다녔나 몰라, 정말.

 생각해보면 외모에 대한 강박은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땐 얼굴 생김새에 대한 관심은 없었지만 남들보다 뚱뚱한 체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뚱뚱하다는 것은 단순히 ‘외형이 못났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둔하고,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여겨졌으니까. 난 둔하지도, 게으르지도, 멍청하지도 않았지만 단지 뚱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수상까지 하게 되었었다. 순전히 내 노력만으로 일구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다음날, 내 발표를 도왔던 선생님의 말에 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어제 정말 잘했어. 다른 선생님도 저기 가운데 뚱뚱한 애 잘 한다고 칭찬하더라.”

 뚱뚱한 애, 뚱뚱한 애, 뚱뚱한 애, 뚱뚱한 애, 뚱뚱한 애, 뚱뚱한 애……. 내 귀엔 ‘뚱뚱한 애’만 맴돌았다. 그러면서 그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는데 그대로 손목을 잡아 뒤로 꺾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이 인간은 이게 칭찬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화가 나고 속상했다. 나는 나일뿐인데, 왜 ‘뚱뚱한 애’가 됐을까. 그저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친 것뿐인데 왜 ‘뚱뚱한데, 발표 잘 하는 애’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내가 뚱뚱하건, 날씬하건, 남자건, 여자건, 나이가 많건 적건, 난 그저 ‘나’로서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한 것뿐인데.

 설령 발표하는 아이들 중 나를 구별하기 위해 ‘뚱뚱한 애’란 단어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됐다. ‘뚱뚱하다’는 말이 얼마나 많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12살 아이를 구별하는 단어로 ‘뚱뚱하다’는 표현을 선택하느냔 말이다. ‘뚱뚱하다’라는 말을 칭찬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어머, 너 너무 뚱뚱하고 예쁘다!’, ‘너 왜 이렇게 뚱뚱해졌어? 완전 부러워!’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파란 카라티를 입은 남자아이, 가운데에 선 목소리가 큰 아이, 주인공을 맡은 아이. 나를 구별할 수 있는 표현은 무궁무진했다. 그 인간이 굳이 나를 ‘뚱뚱한 애’라고 한 것은 ‘뚱뚱하지만 발표를 잘하네’같이 (부정적인)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린 아이에게도 이런 식으로 외모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니 외모에 대한 강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이 만들어낸 미의 기준, 정상의 기준. 어떻게 해서든 거기에 끼워 맞춰야만 했다.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강박은 고등학교 때 절정을 찍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한국애니메이션 고등학교로, 25명의 학생들과 3년 내내 같은 반에서 생활해야하는 곳이었다. 그 25명 중 세 명만이 남자였는데, 불행하게도 내가 그중 하나였다. 왜 불행했느냐면 남자는 나를 제외하곤 2명뿐이니 그 애들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한 명은 정말 누가 봐도 특이한 친구여서 자연스럽게 스테레오 타입에서 제외되었지만, 나머지 한 친구가 스테레오 타입이 되어 나를 강박의 상자 속으로 가둬 두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이래야만 한다’라는 기준점이 그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3년 내내 같은 반인 데다 심지어 기숙사까지 같이 썼으니, 아주 작은 것부터 큰 것 까지 그와 나를 비교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와 완전히 반대 성향이었던 나는 그와 다른 나 자신을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가지지 못한 그의 것을 시기하고 질투했으며, 영원히 가지지 못할 거란 생각에 스스로를 학대하고 구석으로 내몰았다. 그러면서 난 나를 버리기 시작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려 했고, 그가 하는 말을 따라 했으며,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 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상자 속에 갇혀 꺼내 달라 애원하는 내 모습이 보였지만 애써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난 그가 되어야만 했다. 그럼 행복할 줄 알았다.

 이윽고 나는 나의 외적인 부분도 버리기 시작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두꺼운 옷의 지퍼를 턱 끝까지 올려 얼굴과 몸을 가려버렸다. 남들이 내 얼굴을 보는 게 너무 창피하고 싫었고 못 견디게 괴로웠다. 간혹 들려오는 그와 나에 대한 비교의 말들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 한가운데를 찔렀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자신을 꽁꽁 싸매고 감췄다.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고 그의 그림자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루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어느 시점 이후로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나를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상자에 갇혀 질식하는 나를 구해줘야만 했다. 그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해내고 싶었다.

 아끼는 친구였기에 그를 멀리하는 과정은 적잖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물속에 잠겨있던 내가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느꼈다. 그에게서 해방된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숨 막히게 살아왔던가.

 그때부터 나를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간 강박 때문에 하지 못했던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 나갔다. 그중 하나는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편견 때문에 선뜻 도전하지 못했었지만, 나를 찾고 과감하게 그곳에 나를 던져 보았다. 자신감이 생긴 것이었다. 


 여전히 나는 불완전하고 부족한 점이 많은 인간이라는 생각은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분명하게 달라진 게 있다. 그때의 난 불완전한 나를 질식시켰지만, 지금은 불완전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 인간이지만, 부족했기에 나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는 내가 너무 좋다.

 이젠 뚱뚱하다는 말을 들어도 허허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다. 그깟 의미 없는 단어로 상처받고 무너질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나 스스로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웃어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여전히 콤플렉스 투성이인 인간이다. 크지 않은 키가, 뚱뚱한 하체가 불만이고, 굽은 어깨와 허리는 늘 나를 위축시키는 것 같다. 눈에 띄게 잘생긴 외모도,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꿀 보이스를 지니지도, 모델 포스의 화려한 비율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사랑한다. 어찌 됐든 못난 면도 나 자신이니까. 화려하진 않아도 나는 내 얼굴이 좋다. 키는 크지 않아도 맑은 내 눈동자가 좋고, 하체는 뚱뚱해도 부드럽고 깨끗한 내 피부가 좋다. 섹시한 근육은 없지만 도톰한 내 입술은 어쩐지 섹시한 것 같기도 하고, 굽은 어깨와 허리지만 나의 밝은 미소가 좋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어서 참 좋다.


 여전히 예쁜 게 좋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아마 평생 변함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아, 난 예쁘지 않은데’하며 상실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들 본인도 예쁜 게 좋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굳이 나를 통해 재차 확인받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나, 당신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있다. 그건 바로, 당신은 사실 예쁘다는 것이다.

 당신은 존재 자체만으로 충분히 예쁘고 아름답다. 당신을 못 생기게 만드는 것, 그건 병든 마음이다. 상자 속에 갇혀, 깊은 심해 속에 잠겨 질식하고 있는 당신을 이제는 꺼내 주어야 한다.

 당신을 괴롭히는 그 기준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어쩌면 철저하게 남을 위한 것은 아닐까. 상자 속에 갇힌 아름다운 그대가 불쌍하다. 그러니 이제 인정하자. 당신은 당신이어서 아름답다. 당신은 사실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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