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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an 14. 2017

17. 가장 따뜻한 계절, 겨울

겨울이 좋은 이유

 나는 겨울이 정말 싫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싫기보다 '무섭다'. 추운 겨울이 되기만 하면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여름에는 더워서 죽고 싶은 기분인데, 겨울에는 추워서 살고 싶은 기분이야."

 내가 말해놓고도 기가 막힌 표현인 것 같다. 쪄 죽을 듯한 여름에 쏟아지는 육수를 주체하지 못할 때면 콱 이대로 죽어 버리자, 내 한 몸 녹여 아스팔트 바닥 위에 흡수되어버리자, 좋은 삶이었다, 이런 생각을 한다. 그냥 죽어 버리고 싶은 것이다. 반면 허락도 없이 내 뼛속을 일방통행 하는 한 겨울의 칼바람을 맞고 있자면 아, 이대로 죽기엔 너무 아까운 인생이야..,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과안자제보오살, 살려줘 같은 생각을 한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요. 더위 속에서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 또한 있을 것이다. 근데 그거 알아요? 더우면 백화점이나 로드샵 안으로 들어가면 된답니다. 아이스링크장을 방불케 하는 차가운 바람이 서라운드로 펼쳐지니까요. 왜, '냉방병'이라는 병까지 생기지 않았는가. 한 여름에 영화라도 한 편 보러 가려면 담요나 가디건은 필수다. 영화관 실내가 웬만한 겨울 날씨보다 춥기 때문이다. 반면 한 겨울 영화관에서 영화보다 열사병 걸렸다는 사람은 본 기억이 없다.(그것도 참 웃기겠다.) 한 여름의 뉴스에 아나운서가 나와 '냉방병 조심하세요'하고 얘기하는 건 봤어도 겨울 뉴스에 '열사병 조심하세요'한 적은 없던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백화점이나 로드샵이 없거나, 그 와중에 햇빛은 내리쬐고 겨드랑이 워터파크는 개장 파티 중이라면, 그래도 방법은 또 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럼 그나마 좀 낫다. 반면, 겨울엔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아니, 진짜로. 입 돌아간다니까요.

 누가 더 끔찍하냐 우열을 가리겠단 건 아니다. 다만 여름이 겨울보단 비교적 생명유지에 용이한 환경임이 분명한 계절이란 것이다.


 겨울에 대한 끔찍하게 안 좋은 기억 같은 것이 있는 건 아니다. 한 겨울 고시원에서 샤워하러 갔다 방 문을 잠그고 나온 것을 깜빡한 바람에 러닝셔츠에 팬티만 입고 눈보라를 헤쳐 다른 집에서 잤던 경험은 물론 끔찍하긴 하지만, 지나고 나니 추억이 된 정도다. 그저 나는 겨울 바닥에 서 있으면 지난 삶을 찬찬히 정리하며 좀 더 착하게 살지 않았음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삶을 정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추위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것─예를 들면 얼어 죽다 살아났다던지─이라도 있었다면 추위에 맞서 미리미리 그것을 만나지 않을 준비라도 하련만. 겨울은 늘 부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찾아와선 내 뺨을 후려친다. '죽어! 죽어!' 소리 지르면서 말이다.

 <겨울왕국>의 엘사도 너무 싫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얼려버리는 건 너무 하지 않는가. 안 그래도 추운 겨울에 이 영화를 개봉한 배급사 측도 미웠다. 난 분명 2D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의자 사이로 바람이 불고 눈덩이가 스크린을 뚫고 날아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중 'let it go'는 단연 압권이었다. 엘사는 영화 속 지 세상만 얼려놓고 있는 줄 아는 듯 세상 당당한 표정이었는데 객석까지 얼려놓고 있었다. 이 영화를 진짜 4Dx로 본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할까 상상하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기사 제목부터 겨울이 왕국인 영화를 보러 와서는 춥다고 찡찡댈 처지는 아니었긴 하다만... 마지막엔 결국 따뜻한 봄이 와서 다행일 망정이었지, 계속 'let it go'를 부르며 얼음 광선을 쏴 댔다면 난 집에 가서 엘사 안티카페를 개설했을지 모른다.

 겨울은 내게 그런 계절이다. 매력적인 엘사 누나가 아무리 'let it go'를 불러도 멀게만 느껴지는 그런 계절.


 그렇다고 무작정 겨울이 싫은 건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해야 할 건 추위가 싫은 거다.

 추운건 너무나도 싫지만, 생각해보면 난 늘 겨울이란 계절을 기대하고, 기다리기도 해왔다. 레드와 그린 컬러의 심벌이 만연한 크리스마스를, 온 세상을 깨끗하게 덮어주는 흰 눈을, 겨울 특유의 그 분위기를 말이다.

 <겨울왕국>을 보러 갔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속 세계를 보고 싶었고, 겨울이란 계절만이 가진 그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름왕국>이었으면 안 보러 갔을 것 같다. 영화관에서 춥다, 춥다 그리 찡찡대던 나였다만, 막상 엘사가 'let it go'를 부르며 자외선 광선을 쏴 온 세상을 사막화시키고 지구온난화를 야기하는 마법을 펼쳐 보였다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썩어버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디즈니가 후속작으로 <여름왕국>을 만들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일 거라 생각해본다. 엘사가 빛났던 이유는 그녀의 세계가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매력적인 계절이고, 그녀 캐릭터가 겨울 그 자체였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겨울은 매력적인 계절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군것질인 붕어빵과 계란빵, 두툼하고 예쁜 겨울 코트, 후후 입김을 불어가며 먹는 뜨거운 어묵 국물, 가슴을 설레게 하는 크리스마스 캐럴, 고요하고 거룩한 설산의 풍경, 이불속에서 손 끝이 노랗게 될 때까지 까먹는 귤, 그 속에서 읽는 만화책 더미, 온몸에 착 달라붙는 예쁜 색의 니트는 사실 겨울이 아니면 만나 보기 힘든 것들이니까. 이것들은 모두 내가 겨울을 결코 미워할수만은 없는 이유고, 되려 이 계절을 놓치고 싶지 않게 까지 만드는 매력요소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겨울이란 계절은 모든 것을 얼려버릴 만큼 꽁꽁 언 차가운 계절인데, 겨울이 밉지않은 이유, 매력적인 이유가 전부 따뜻한 것뿐이라는 게.

 생각해보니 결국,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따뜻하기 때문이다. 꽁꽁 언 마음을 녹일 어묵 국물이 있어서, 따뜻하게 안아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늘 겨울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은 모든 것의 한 면만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흑 아니면 백, 물 아니면 불, 남 아니면 여, 삶 아니면 죽음. 때론 이 상극 사이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둔 채 성격을 정의 내려버리기도 한다. 흑은 어둡고, 암울하고, 부정한 것. 백은 깨끗하고, 순수하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차가운 계절인 겨울은, 사실 따뜻하다는 것을. 겨울은 차갑다, 라는 세상이 내린 정의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겨울이 차갑기만 했다면 난 겨울을 이해할 노력조차 하지 않고 기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의 따뜻함을 발견했다. 우리가 사는 삶이란 것도, 칼로 잘라내듯 그렇게 정확하게 너와 나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선 차갑고 우울한 컬러인 블루를 엠마와 아델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녹여냈다.(영단어 blue는 우울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남들과는 다른 색, 파란 사랑이더라도 따뜻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차갑고 우울한 색인 블루가 가장 따뜻한 색이 된 것이다.

 모든 존재엔 한 모습만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보이는 것만 보려 했던 나의 편견일 수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을 겨울에게서 배웠다.

 겨울에겐 따뜻한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내가 그리도 싫어하는 추위 때문에 찾은 장점이었다.

 나뿐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위 속에서 따뜻함을 찾아내고야 만다. 뜨거운 팥이 가득한 붕어빵을 사 먹고, 두툼한 장갑과 귀마개를 하며, 옆에 있는 사람을 꼭 껴안기도 한다. 춥기 때문에 따뜻함을 찾아간다. 결국 겨울을 따뜻한 계절로 만드는 것은 나의 힘인 것이다.


 겨울이 춥다고 마냥 피하기만 하는 것보다, 너와 나의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두어 그 안의 따뜻함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결코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델과 엠마의 만남처럼 서로를 껴안아주는 것은 어떨까.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 내 전부를 좀먹고 질식시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그냥 덮어두고 싶을 수도 있다. 내가 그리도 추위를 무서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린 늘 그래 왔듯 따뜻함을 찾아낼 것이다.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그런 힘이 있음을.


 겨울은 사실 따뜻한 계절이다. 당신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아직 살만 한 곳이에요.


*제목은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Blue is the warmest color> 에서 인용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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