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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an 23. 2017

18. 추억을 마시다

너와 나의, 소울푸드(3) 쑥차

 나는 어린 시절 단칸방에 살았다. 그냥 단칸방도 아닌 구멍가게에 딸린 작은 단칸방. 사실 말이 단칸방이지 가게 한 편에 벽을 세워두고 그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수준이었다.

 방은 우리 네 가족이 잠을 자려 누우면 꽉 차는 그 정도의 크기였다. 그 와중에 TV며 컴퓨터, 옷장 같이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어쩌면 요즘 트렌드인 미니멀리즘, 단순하게 살기는 그때 우리 가족이 이미 실천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딱' 필요한 것들만 있었으니까.

 너무 미니멀한 나머지 화장실은 따로 있지 않았다. 화장실을 쓰려면 지하의 양말공장 직원들과 같이 쓰는 외부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는데, 추운 겨울엔 화장실 가는 게 어찌나 귀찮았는지 모른다. 더불어 양말공장 직원들과 같이 쓰는 공용 화장실이라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생각해 보아라. 그들은 단순히 용변을 해결하기 위한 공중 화장실인데, 우리에겐 '집' 안의 화장실이지 않은가. 더운 여름 목욕을 하다(목욕 시설은 외부 창고에 천막을 쳐놓고 물을 끌어와 사용했다.) 갑자기 배라도 아파지면 그대로 그 화장실로 달려가는 거다. 당신이 상상하는 대로, 벌거벗은 채로 말이다. 지금의 나라면 뭐라도 대충 걸치고 갔겠는데 뭐, 어두운 밤이기도 했고 어렸을 때니까 그런 지각이 없었나 보다. 그대로 달려가 시원하게 일을 봤다. 그런데 양말공장 외국인 직원이 그만 문을 열어버렸다. 그도 당황, 나도 당황. 오밤중에 벌거벗고 응아 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일 테니까. 그가 한국의 용변 문화를 잘못 이해 하지나 않았을까 걱정됐다. 다행히 힘내라는 응원 같은 건 없이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참 사려 깊은 사람이야. 그런 사건은 한 번뿐이 아니었다. 여럿이서 쓰는 공중 화장실이니, 그런 사건이 아예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가게는 곧 집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일과 생활의 구분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엄마는 김치찌개를 끓이다 말고 물건 사러 온 손님 계산해주러 나가고, 아빠는 방의 고장 난 문을 수리하다 말고 만취한 취객을 상대해야 했다. 아빠, 엄마가 가게를 비우면 누나와 내가 가게를 봤고, 우리가 없으면 아빠 엄만 카운터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했다. 늦은 밤, 가게의 셔터를 내리고 나면 카운터는 아빠의 술자리가 되어주기도 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브라운관을 안주 삼아 조용히 소주를 마시던 아빠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가게는 시시때때로 그 모습을 바꿔가며 우리 가족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 집이 곧 가게였고, 가게가 곧 집이었다. 난 지금도 어렸을 때 살던 '집'을 생각하면 그 가게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래도 그 좁은 집에서 할 건 다했다. 자그만 단칸방 안에서 윤선생이나 구몬 같은 방문학습도 꾸준히 했고, 누나는 친구들을 잔뜩 데려와 파티를 열기도 했다. 엄만 그 작은 부엌에서 치킨이며 햄버거, 피자 같은 것까지 만들어 주기도 했다. 2002 월드컵 때는 가게 옆 창고에 큰 TV를 설치해 동네 주민들을 불러 모아 축제를 열었다. 그때의 열기는 아직까지도 회자될 정도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리 할 수 있었던 우리 부모님이 새삼 존경스럽다. 어찌 보면 우리 부모님의 일터에 누나와 내가 항상 있던 것이니,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보다 더 훌륭한 교육이 어디 있겠는가. 아빠, 엄마. 존경합니다.

 사실 당시에 부모님은 '돈이 없다', '아껴야 된다', '우리 집은 가난한 집이다.'란 말씀을 많이 하셨다. 위에 적은 단칸방 얘기만으로도 아마 납득이 가리라. 그런데 당시에 나는 이 말에 도무지 공감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가난하다는 거야?' 싶었다. 가족끼리 살 비비며 사는 것,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재정적으로는 가난할지라도 마음만은 부족함이 없던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부모님이 '가난하다' 얘기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화도 났다. 가난하다는 말이 싫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다 부모님의 희생 덕이었단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진짜 가난했는데 가난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는 것, 이거 진짜 대단한 일 아닌가. 아빠, 엄마. 사랑합니다.


 그래서인지 나의 어릴 적 기억은 대체로 아름답다. 가족이 단칸방에 옹기종기 누워 이야기 꽃을 피우던 순간도, 일요일 아침이면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려 번쩍 일어났던 순간도, 엄마 생신상을 차려 드리겠다고 아빠를 도와 굴 전, 굴튀김, 굴 죽, 굴 회 등 온갖 굴요리를 준비하던 순간도(지금 생각하면 아빠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더운 여름 목욕하는 천막 공간에서 얼음물로 등목을 하던 순간도, 고스톱을 치는 엄마 무릎 위에 누워 쌔근쌔근 잠이 들던 순간도,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다 같이 눈사람을 만들던 순간도, 홍수로 인해 물이 찬 방의 물을 퍼내던 순간도, 아빠 안마해주겠다고 등에 올라타 춤을 추던 순간도, 홍역에 걸린 누나를 간호해주던 순간도, 새로 받아온 상장을 코팅해 벽에 걸었던 순간도, 산타가 아빠인 걸 빤히 알면서도 머리맡에 갖고 싶은 선물 목록을 작성해 잠이 들던 순간도, 가족끼리 다 같이 맛있게 된장찌개를 퍼먹던 순간도, 엄마가 튀겨준 치킨을 나눠 먹던 순간도, 방과 후 집에 돌아와 아이스크림 하나 꺼내 먹으며 더위를 식히던 순간도, 빵 속의 포켓몬 스티커를 잔뜩 모아 가게 문에 붙여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만끽하던 순간도, 쌀 포대에 손가락을 푹 집어넣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던 순간도, 양말 공장 직원들과 화장실서 마주하던 순간도, 새끼 고양이를 데려와 키우던 순간도 내게는 전부 보석 같은 추억들이다. 십 년이 넘게 살았으니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추억이 많다. 드라마를 만들어도 끊임없는 시리즈를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누나와 마차를 마시다 이런 얘기가 나왔다.

 "그거 기억나? 우리 어렸을 때 이것처럼 쑥차 타 마셨잖아. 정말 걸쭉하게."

 쑥차. 맞아, 잠시 잊고 있었다. 그것 역시 나의 보석 같은 추억 중 하나였는데.

 쑥차를 아는가? 녹차, 홍차는 들어봤어도 쑥차는 아마 생소할 것이다.

 우리 집엔 쑥차 가루가 있었다. 그 출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엄청나게 퍼 먹었던 것만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쑥차는 쑥으로 만든 분말 가루다. 쉽게 생각해 율무차의 쑥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누나와 나는 이 쑥차를 정말이지 엄청나게 먹었다. 입맛이 비슷해 먹는 방법까지 똑같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왜 차를 그렇게 마셔?'라고 할 게 분명하다. 물과 쑥차 가루를 거의 1:2 비율로 섞어 마셨거든요. 아니, '먹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거의 죽을 만들어 먹은 거니까.

 거의 수프가 된 따뜻한 쑥차를 숟가락으로 퍼 먹으면 부드러운 온기가 온몸에 퍼졌다. 향긋한 쑥 향에 취해 웅녀가 왜 그리 쑥을 싫어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뻥입니다. 전 냄새를 못 맡아요. 누나는 그랬을 것 같다고요.)

 쑥차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뭉친 가루 덩어리다. 물에 가루를 잔뜩 넣고 웬만큼 많이 저어주지 않으면 듬성듬성 가루 덩어리가 뭉치는데, 이거 이거, 이게 또 별미예요. 마치 팥죽 속의 옹심이를 먹는 기분이랄까? 걸쭉한 쑥차를 마시다 가루 덩어리라도 씹게 되면 입 안은 말 그대로 단짠(달고 짜고) 파티다. 뭉친 가루에서 단짠의 집약체가 폭발하는 것이다. 일부러 이 덩어리를 먹기 위해 덜 저어 주기도 했다. 웃긴 건, 누나도 그랬다. 누가 가족 아니랄까 봐.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쑥차의 정체는 쥐 똥만큼 들어있는 쑥가루에 설탕과 화학조미료 범벅이었던 것 같다. 율무차처럼 말이다. 그 어린애들이 몸에 좋은 것을 그리 퍼 먹었을 리 없지. 근데 이건 비밀인데, 실은 알면서도 계속 먹었어요. 건강한 차라는 이미지가 면죄부를 줬거든. 맛있으면 0칼로리, 몰라요?

 지금도 이 쑥차를 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예전에 갑자기 먹고 싶어 검색해 봤었는데, 누나와 내가 먹었던 그것은 나오지 않았다. 만약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구입이 망설여질 것 같기도 하다. 그때 그 맛이 나지 않을까 봐. 추억의 맛이 사라져 버릴까 봐.


 우린 마차를 마시며 십 수년 전 우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그만 부엌에서 주전자에 물을 끓여 쑥차를 타 먹던 소년과 소녀. 소녀는 어느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내게 마차를 내어줬다. 쑥차의 추억을 환기시키며 말이다. 그때의 우리, 그리고 지금의 우리 사이의 간극을 느끼며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우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걸어온 것이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임을 알기에 마차로 마음을 달랬다. 색깔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아린 가슴을 데울 만큼의 온기가 있었다. 쑥차를 닮은 마차의 온기였다.

 15년이 넘게 지났어도 입맛은 변하지 않았나 보다. 마'죽'을 만들어 먹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쑥차면 더 좋겠다만 이젠 구하기 힘드니 이것으로 대리만족하는 수밖에. 사실 쑥차를 마신다 해도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진짜로 마시고 싶은 건 다시 마주할 수 없는 그때의 보석 같은 순간일 테니까.


 이건 여담인데, 20년이 넘게 자리를 지켰던 우리 가게는 지금 미용실이 되어버렸다. 추억을 곱씹으려 간혹 찾아갔었는데, 미용실이 된 것을 봐 버린 이후론 가지 않았다. 영원할 것만 같던 어떤 것이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기록으로 추억한다. 내 마음속에서 만큼은 영원하길 바라면서. 내 글이 쑥차를 닮은 마차의 온기를 품기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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