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는 것을 그 때 알았다면...
징병, 징용, 위안부의 구분
다수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는 항상 논란을 동반한다.
윤미향 님이 국회의원이 된 것도 시민추천 방식이었다.
일제강점기 피해자를 지원하는 복수의 시민단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오래되고 유명한 단체인 정의기억연대의 리더가 비례대표로 추천 된 것이다.
논란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바라는 점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공익법인의 회계절차가 투명해지는 것이다.
다수 합의로 의사결정을 하는 단체는 회계절차가 불투명 할 수록 조직의 와해 위험이 높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번 논란 속에서 이용수 할머님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팠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외갓집 재산 문제로 큰 이모와 외삼촌 간에 다툼이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 어머니는 이 다툼에 끼어들지 않았다.
당시에 어머니와 외갓집을 가면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외삼촌에 대한 걱정과 불만을 이야기하셨다.
그 때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 시누이도 다 이유가 있을거에요.
그 애(큰 이모) 말만 듣고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시누이를 좋게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엄마 마음이 편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이 일 이후로 어머니는 외갓집에 가는 일이 적어지고 모든 심부름은 내가 가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직접 만드신 음식을 담아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즘 공부는 잘하니?
요즘 니 엄마가 전화를 잘 안해주니 소식을 물을 수가 없어."
"할머니, 1학년 때 보다 성적이 많이 올랐어요."
"그래? 우리 손자 효자네. 부모 마음 편하게 해주는 자식이 효자야.
너도 엄마처럼 효자구나."
이 때 할머니의 연세가 70대 후반이었다.
가끔 큰이모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실 때 고통스러워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용수 할머님 연세를 90대로 알고 있다.
그 분의 정신 건강을 챙기며 보살펴 주는 사람들이 할머니 주변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 일로 이용수 할머님이 더 외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제목을 정한 이유를 말하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병 또는 징용으로 자식을 보낸 부모들은 군대 또는 일터의 구분만 알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징병과 징용으로 사람들을 강제 동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징병이나 징용의 구분은 그 분들에게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광산에서 매몰 사고로 죽으나 전쟁터에서 총알에 죽으나 자식을 사지로 보내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에 강제 동원에 협력한 자들과
고학력에 외국어가 가능한 지식인층은 징용 그룹에 위안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어린 딸을 일찍 시집보내는 조혼이 유행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장준하 선생도 제자가 징용이 된다고 하자 위안부로 가게 될 위험을 알고 귀국하여 제자와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 나를 돌봐주신 할머니도 마을에서 이장 역할을 하신 아버지가 중학생 나이에 본인이 바라지 안은 결혼을 시켰다고 말씀하셨다.
이용수 할머니와 그 분의 부모님이 1930년대에 징병과 징용, 그리고 위안부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딸은 위안부로 동원된다는 것을 아셨으면 어땠을까?
지금 이용수 할머님께서 구분하려는 개념의 차이를 그 때도 알았다면...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매우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