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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n 24. 2024

멀어지는 것


 하나하나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자칫 보잘것없어 보이는 순간들, 여행하는 동안 흔히 마주치는 심상한 장면들을 평생의 이야깃거리로 탈바꿈시켜 주는 건, 훗날 돌이켜 보면 아주 사소한 순간들의 연결에서 비롯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인적이 사라진 텅 빈 광장에 홀연히 나타난 한 남자의 검은 우산, 마른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면서 창을 두드리는 새벽녘 빗소리, 한 량짜리 열차가 나타났다 사라질 때마다 터널 가득 흩날리는 이른 4월의 꽃비, 기름때 고인 바다 한가운데로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드는 까까머리 아이들 그리고, 그 얼굴 위로 소복이 내려앉던 한여름 햇살 같은- 그런 순간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쳐 버린 시시콜콜한 순간들을 되짚어 자못 근사한 이야깃거리 하나를 조합해 낸 우리는, 못해도 1년은 허풍기 다분한 수다쟁이가 되어 살아볼 수도 있고, 어쩌면 족히 3년은 잊지 못할 추억 속에 파묻혀 살 수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 끄집어낸 그럴싸한 장면 하나에 평생 여행자로 살아도 좋으리라, 그런 황홀한 꿈도 잠시 가져 볼 수 있지 않을까?



 필름 카운터조차 제대로 감기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서랍 속 깊이 숨어 있던 낡은 카메라를 우연히 찾아내 꺼내 들었던 날. 필름이 감겨 있는 줄도 모르고 무심코 덮개를 열었다가 빛이 새어 들어가 고이 잠들어 있던 시간의 흔적을 몽땅 날려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던 날. 종종 발걸음 했던 사진관 문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열고 들어가 현상을 맡기고 돌아서던 날. 며칠이 지나 마침내 받아 든 사진 속에서 되살아 난, 몇 년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 저편의 순간들. 그리고 온통 뿌옇게 핀이 나간 사진 속에서도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장면을 떠올리고는 혼자서 그토록 흐뭇하게 미소 짓던 날.



 나는 그런 날들을 위해, 먼저 배꼽 아래 작은 영사기 놓을 자리 하나를 만들어 두려 한다. 그 옆에는 빈 필름 가득한 상자를 높게 쌓아 놓고, 이제껏 지나온 시간의 흔적들을 필름 위에 차곡차곡 새겨 넣어둘 참이다. 잊지 말고 날짜도 새기고 장소도 적어 놓아야겠지. 그것은 늘어놓은 필름 위에 하나씩 하나씩 가지런히 새겨질 나의 모든 순간들은 시간에 시간을 겹겹이 쌓아가는 동안 하나의 추억으로 단단히 뭉쳐 경화되고, 그 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미동도 없이 머물러 있을 것임을 이제는 깨닫게 된 까닭이다.


 하여 나는 허기질 때마다 그렇게, 배꼽 아래 수두룩하게 쌓인 필름 상자를 기꺼이 헤집고 들추어, 배가 부르도록, 배가 터지도록 꺼내고 또 꺼내 볼 작정이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만의 작은 영사기 하나, 배꼽 아래 곱게 지어 두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무엇으로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을 때, 온 몸이 텅빈 것만 같을 때, 언제든 멀어진 시간을 거슬러 올라, 닳고 닳도록 당신의 추억을, 당신만의 기억을 꺼내 볼 수 있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아무 것도 새겨진 것 없던 깨끗한 필름 위에 셔터를 누르는 순간 영원히 남겨져 버린 순간 처럼, 나의 기억은, 당신의 추억은, 우리의 시간은 처음 새겨진 그 자리, 그 시간, 그 날, 그 모습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그저 돌아서 걸어가면 될 뿐이다.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를 멤도는 것만 같을지라도 조금만 더 되짚어 아스라한 자취를 따라가 보자.


사라진 것이 아니라, 깊은 서랍 속 낡은 카메라 처럼, 그 속에 잠든 오래되어 듬성듬성 곰팡이 핀 필름 처럼 잠시 멀어져 있었을 뿐이다.


멀어지는 건 추억이 아니다.

멀어지는 건 언제나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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