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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l 15. 2024

사랑할 게 지천이야

너의 사랑법

 의기양양하게 타오르던 해도 어느덧 수평선 너머로 기울어 간다. 이따금 바다 건너 불어온 바람 덕에 살갗을 덮었던 한낮의 열기도 조금은 옅어진 것 같다. 다만, 아직 모든 것이 생각만큼 옅어진 것은 아니었는지, 사진을 찍으려고 별생각 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땅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종일 몽롱하게 늘어져 있던 정신이 온통 벌겋게 데여 버렸다. 쓸데없이 두껍고 비대하기만 한 오리궁둥이에는 이제 최소한의 노릇도 기대하기 힘든, 지방 덩어리만 남아 버린 모양이다.



 궁시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전혀 생각지 못하던 일이 벌어졌다. 등 뒤에서 누군가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은 것이다. 어리둥절해 뒤를 돌아봤더니 눈앞에 두 사람이 서 있다. 웃옷을 반쯤 돌돌 말아 올려 배 위에 걸친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의 사내와 부풀린 사자 머리가 가녀린 바람에도 풍성하게 나풀거리는 어린 여자 아이.


 남자가 아이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입을 크게 벌려 웃는다. 반은 까맣게 썩었거나, 군데군데 삭아 떨어져 나가 엉성한 그의 치아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바래고 남루한 티셔츠, 제멋대로 구겨지고 해진 바지에 때 묻은 운동화 차림이었지만 행색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다. 설령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어느 케이블 채널 저녁 방송에 나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지 설파하는 모습을 본다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는 웃었다.


 남자의 손을 잡고 옆에 선 아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나를 보고 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나도 씨익, 웃었다. 입꼬리만 살짝 움직였던 것 같다. 어쩌지, 억지웃음처럼 보이진 않았을까, 괜히 혼자 신경이 쓰였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 순간 아이가 보인 행동은 전혀 뜻밖이었다. 아이는 성큼 다가와 이번에는 정면에서 다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꼬불거리는 사자 머리가 얼굴을 가득 덮었다. 귓불 밖에서 아이의 목소리기 나지막이 속삭인다.


“I love”


잘못 들었나? 아니, 아이는 내 귀에 대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샤르륵, 상냥한 바람에 흩날리는 책장처럼 사자 머리칼이 얼굴에 와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 그럴 때마다, 소라껍데기를 귀에 대야만 들을 수 있던 소리가 들렸다. 청아한 파도소리였다. 아이는 또 한 번 속삭였다.


“I love”


사랑한다고? 누구를? 설마 나를? 그럴 리가 없잖은가.

대체 무얼 사랑한다는 말일까?

 

 목적어 없이 제 하고 싶은 말만 짧게 한마디 남긴 아이는 애초에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남자의 손을 잡고 곁을 스쳐 멀어져 간다.


 열 걸음쯤 걸어가던 아이가 문득 돌아서 손을 흔들더니 그다음부터는 아예 서너 걸음에 한 번씩 돌아서서 웃는다. 한참 멀어져 표정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연신 돌아서서 웃는다. 아이가 돌아서 웃으면 아비는 그런 아이를 흐뭇하게 먼저 바라보고는 훤히 깐 배를 긁으며 따라 웃었다.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두 개였던 점이 하나가 되는 동안 나는 쪼그려 앉아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들리지 않아도 들린다.


Habana, Cuba.


그렇게 완전히 멀어져, 이제 갓 저물어 설익은 연노랑 노을 속으로 두 개의 점이 하나가 되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의 말에 왜 목적어 따위는 필요가 없었는지.


도시는 사랑할 게 지천이었다.


짠 내 머금은 텁텁한 바다 냄새도,

노랗게 저물어 가는 하늘도,

아직은 설익은 하늘에 번지는 연보랏빛 노을도,

바람에 맞서 펄럭이는 사자머리칼도

저만치 멀어진 아이의 미소도,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저 잠시 스쳐 갈 뿐이었던 나라는 존재조차도.










Habana, C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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