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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l 09. 2024

파리(Paris), 낭만의 도시?

새빨간 거짓말

 드골 공항을 벗어나 파리 시내로 가는 RER열차에 몸을 옮겨 실었다.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객차 스피커를 흘러나오는 여인의 매혹적인 목소리에 실린 프랑스어가 연신 귓불을 간지럽힌다. 간지러운 목소리와 서먹한 시선으로 가득 찬 객실 틈을 비집고 들어와 빈자리 하나를 골라 앉았다. 몇 번인가 푸드덕거리던 기차가 천천히 철로를 미끄러져 움직인다.


 철로와 철로 사이를 잇는 틈을 지날 때 마다 기차가 규칙적으로 덜컹거린다. 덜컹거리는 리듬에 몸을 싣고 있으려니, 영사기 빛을 받아 하얀 벽에 멀겋게 그림을 비춰주던 슬라이드 필름의 잔상처럼 몇 가지 장면이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버지와 내 어린 시절의 흔적이었다.


“내일 기차타러 가자”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바다보러 가자”라거나 “설악산에 갈까”같은 말이 아니라, “기차타러 가자”고 했다. 애정 표현은 고사하고, 말 한 번 살갑게 걸어주던 일 없는 무뚝뚝한 사내였던 아버지는 가끔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그렇게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서곤 했다. 나름의 표현 방식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지만, 십 수년이 흐른 지금도 아버지는 곁을 잘 내어주지 않고, 말수가 적다. 그와 나는 여전히 데면데면하다.


 그런데도, 영사기 조명 속에 제일 먼저 나타난 광경은 내 작은 손을 말아쥐고 기차역 검표소를 통과하던 그 시절 아버지의 투박한 손등이었다. 경쾌하게 서걱거리는 펀칭 가위로 티켓에 구멍을 뚫는 역무원의 모습도 스쳐갔다. 몇 가지 장면이 이어진다. 좌석이 줄지어 늘어선 객실, 때타고 담배를 털다 생긴 것 같은 구멍이 군데군데 있는 촌스러운 녹색 의자를 무심하게 툭툭 털고 창가 자리를 내주던 아버지의 얼굴도 영사기 조명 너머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창을 넘어 흘러드는 햇살이 따가워 햇빛 가리개를 끌어 내려 걸쇠에 걸던 아버지의 팔뚝도, 흔들리는 객실 통행로를 아슬아슬 지나가던 주전부리 카트를 멈춰 세우고 잠든 아버지를 호기롭게 흔들어 깨워서는 귤과 사이다, 달걀 따위를 사달라고 졸라대던 광경도 떠올랐다.


 어디로 가는거라 설명을 해 준 들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도 못했고 어떤 가족들에겐 별 거 아닌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시종일관 같은 리듬으로 덜커덩거리는 기차의 흔들림이나 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수풀더미며 가로수, 코끝에서 한참을 사라지지 않고 괴롭히던 들판의 짙은 소똥 냄새까지, 그 시절 나에겐 기차를 타는 것 그 자체가 가슴 두근거리는 하나의 이벤트였다.


 플랫폼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RER 열차 창 밖으로는 이제 아무래도 좋은 풍경이 빠르게 멀어져간다. 열차가 다시 덜컹거렸다. 미지의 세계에 첫 걸음을 디뎠다는 설렘, 앞으로 며칠간 펼쳐질 여행을 떠올리며 느껴지는 흥분, 하나 둘 늘어갈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가 뒤섞여 나의 작은 심장도 함께 덜컹거렸다. (비록 그 부푼 가슴이 산산이 터져 부서져 내리는데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궁화호 보다는 확연히 빠른 속도로 달리던 열차의 속도가 느려진다. 짐을 챙기고 내릴 준비를 한다. 목적지에 도착한 RER 열차의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애틋했던 어린 시절까지 떠오르며 차곡차곡 쌓였던 파리 여행의 기대감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기대하지 않았던 냄새가 코끝을 덮쳐 온 탓이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환승 지옥이라는 신도림역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한 역 안을 헤매는 동안 냄새는 더 짙어졌다. 사람들이 발길이 잦아든 시골 간이역 한참 방치된 화장실에서나 맡아본 것 같은 악취가 나는 곳을 지나기도 했다.


'여기가 진짜 파리 맞아? 잘못 내렸나? 이 지린내 나는 도시가 그 예술과 명품의 도시, 로맨틱의 대명사 바로 그 파리라고?'


 코를 찌르고 신경을 건드리는 냄새를 입으로만 숨을 쉬며 틀어 막고, 눈으로는 출구 사인만을 좇았다. 무뎌진 걸까? 아니면 이미 익숙해 진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저 사람들도 얼굴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을 뿐일까? 애타게 출구를 찾아 헤매는 나의 모습과 그런 나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무덤덤한 표정 위로 겹치는 우아한 프랑스어 안내 방송이 간헐적으로 들려올 때 마다 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역시 내가 너무 민감한 건가?'


 허름한 벽 앞에 홀로 서서 노래하는 이름 모를 가수, 좁은 통로를 점령하고 저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 경쟁하듯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파리지앵과 악취 따위에 지지 않고 진한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까지. 파리를 떠난 후에, 아니 당장 내일부터 내가 얼마나 파리의 치하철을,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RER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게 될지 매캐하고 시큼한 냄새 가득한 공간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먼저였던 이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시 출구 사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 어깨 너머로 계단을 올라가는 여행자들의 여행 가방이 보였다. 허벅지까지 오는 큼지막한 가방을 허리춤에 엊고 그 뒤를 이어 꾸역꾸역 계단을 올라 암모니아 냄새 가득한 동굴을 탈출했다. 하늘은 파랗고 맑았다. 악취도 사라졌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건 에펠탑도, 세느강도, 몽마르트 언덕도 아닌 그저 신선한 공기 한 모금이었다.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한가득 새로 숨을 들이마셨다.


기차 안내 방송보다 몇 배는 매혹적이고 몇 배는 사랑스러운 프랑스어가 사방에서 들려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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