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서도, 관계에서도, 기도에서도 나는 꽤 잘 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필요한 반응을 내놓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잘 듣지 않는다”고 말할 때면, 의아해했습니다.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동의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듣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상대의 말이 시작되면 이미 내 안에서 판단을 시작했고, 반박의 문장을 준비했으며, 결론을 예측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말은 들렸지만 마음은 닿지 않았습니다. 나는 정보를 들었지, 사람을 듣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들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소리를 인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받아들이고, 방향을 조정하고, 삶을 바꾸라는 요구입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나는 많은 말을 들었지만, 정작 거의 듣지 않았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나를 비워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듣지 못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듣는 순간 내가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말이 나의 판단을 수정하라고 요구할 때,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할 때, 혹은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드러낼 때, 나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부터 듣기는 대화가 아니라 방어가 되었습니다.
기도에서도 나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듣고 싶은 답을 정해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묻기보다는 설명했고, 기다리기보다는 결론을 요구했습니다. 침묵은 짧았고, 말은 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음성은 점점 희미해졌고, 기도는 점점 나의 말로만 채워졌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상대를 설득하기 전에, 나 자신을 내려놓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즉각 반응하지 않고, 한 박자 늦추며, 이해되지 않는 말을 성급히 정리하지 않는 것. 그리고 “아직 충분히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태도. 이 작은 변화가 관계의 결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는 그때 듣지 못했는가. 답은 단순합니다. 듣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듣기는 기술이 아니라 훈련이고, 그 훈련은 언제나 나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일입니다. 나에서 타인으로, 확신에서 경청으로, 말에서 침묵으로 말입니다.
완전히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듣지 못하는 나 자신을 외면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식이야말로, 다시 듣기 위한 첫 걸음임을 이제는 믿고자 합니다.